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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와 선, 이와 사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불교를 선종이니 교종이니 운운하고, 이판(理判, 좌선수행을 주로 하는 선승)이니 사판(事判, 조직운영을 책임지는 살림꾼들)이니 하여, 분별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합니다. 불교사를 다루는 데 있어 방편적으로 쓰지 않을 수 없는 개념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敎)’와 ‘선(禪)’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교종ㆍ선종을 운운하기 전에 불교 그 자체를 고구(考究) 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는 학승은 선경이 높질 못하고, 좌선만 하다가 득도했다 하는 스님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고 스님들이 서로서로 비난하는 소리가 잘 들려와요. 선과 교를 분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이런 대립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서산대사나 경허대사나 그런 류의 대덕들이 모두 치열한 선적인 구도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오늘 우리에게 추앙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교학불교의 마스터라는 데 있습니다. 지눌도 그러했고, 원효의 시대에는 선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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