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거문고 연주가 김명곤의 기구한 삶을 담게 된 이유
金溟鯤者, 嶺南玄風人也. 九歲薙髮, 法名竗園. 十六随師徽遠, 學禪於毗瑟山瑜伽寺石窟, 不寐者數月, 忽發狂疾. 遂變緇, 學琵琶於湖南老樂工, 未周年爲國工. 而雲遊四方, 食於手者, 數三年矣.
二十轉至關西宣鐵之間, 忽遇毛都督麾下士樊後遲. 樊生卽知音者, 一聞奇其才, 遂偕入椵島, 紹介於文龍. 毛帥大供具於鎭海樓, 命其寵姬花兒及養子李堅, 各試其技藝. 於是, 花兒抱琴, 李堅理瑟, 而聚樂皆張, 然後命溟鯤奏琵琶. 毛帥一聽, 大奇之. 遂使坐上座, 叱退諸樂曰: “此天下之妙手也. 汝等眞奴才, 不可齒於此人” 花兒李堅大赧而退. 毛帥極愛鯤之才, 每於良辰, 聽之不厭, 或西望故國, 泣下數行. 遂賞鯤以廣寧美娃後紫雲, 近住於運籌堂外. 其愛將耿仲明孔有德, 小會曲宴, 鯤輒在座. 後毛都督爲中朝袁崇煥所殺.
及至丙丁之間, 紅酋東蹂, 廻兵襲取椵島, 島兵見劉. 鯤於亂兵中, 失其家人, 逃竄海嶼. 轉至于江陵海邊, 寄身漁家, 其主翁死, 孑孑無依, 遂還漢陽, 旋入松都, 依於馬僉知某. 或於遊宴, 試彈琵琶, 大爲座客延譽.
俄而馬老亦死, 翻向海右, 至長淵金沙寺, 依耆臘海淸上人. 以海淸使事, 到載寧延津田舍, 謂余曰: “聞上舍病寓於此. 跟尋窮巷, 欲得一語, 敍我始泰終否之狀.” 余仰而有間曰: “爾言, 吁可悲哉! 否泰相交, 理所然矣. 昔白司馬之所遇琵琶女訴怨, 亦猶爾也.” 遂用白公韻, 名以「後琵琶」行.
해석
金溟鯤者, 嶺南玄風人也.
김명곤이란 사람은 영남의 현풍 사람이다.
九歲薙髮, 法名竗園.
9살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묘원’이라 법명을 지었다.
十六随師徽遠, 學禪於毗瑟山瑜伽寺石窟,
16살엔 스님 휘원을 따라 비슬산 유가사 석굴에서 참선을 배웠고
不寐者數月, 忽發狂疾.
잠을 자지 못한 몇 달엔 갑자기 미친 질병이 발광했다.
遂變緇, 學琵琶於湖南老樂工,
마침내 승복을 바꿔 입고 호남의 노숙한 악공에게서 거문고를 배워
未周年爲國工.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국공이 되었다.
而雲遊四方, 食於手者,
사방으로 구름처럼 유람하며 악공의 수단으로 밥벌이 한 지
數三年矣.
3년 정도였다.
二十轉至關西宣鐵之間,
20살에 관서의 선천(宣川)과 철산(鐵山) 사이를 전전하며 이르렀다가
갑자기 모 도독 휘하의 장수인 번후지를 만났다.
樊生卽知音者, 一聞奇其才,
번생은 음률을 아는 사람이라 한 번 거문고 소리 듣고 기이하게 여겼고
마침내 함께 가도로 들어가 모문룡에게 소개했다.
毛帥大供具於鎭海樓,
모 원수는 크게 진해루에 잔치를 열어
命其寵姬花兒及養子李堅, 各試其技藝.
총애하는 계집 화아와 양아들 이견에게 명하여 재주와 기예를 각각 시범하도록 했다.
於是, 花兒抱琴, 李堅理瑟,
이때에 화아는 비파를 잡고 이견은 거문고를 켰고
而聚樂皆張, 然後命溟鯤奏琵琶.
모여 모든 장단을 연주한 후에 명곤에게 거문고를 연주하길 명하였다.
毛帥一聽, 大奇之.
모문룡 원수는 한 번 듣고선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遂使坐上座, 叱退諸樂曰:
마침내 상석에 앉도록 했고 모든 악공을 물러나게 하며 말했다.
“此天下之妙手也.
“이는 천하의 오묘한 재주다.
汝等眞奴才, 不可齒於此人”
너희들은 참으로 졸렬한 재주를 지녀 이 사람에 비교할 수조차 없다.”
花兒李堅大赧而退.
화아와 이견이 매우 겸연쩍어하며 물러났다.
毛帥極愛鯤之才, 每於良辰,
모 원수는 매우 명곤의 재주를 아껴 매번 좋은 때에
聽之不厭, 或西望故國,
그걸 듣고 싫어하지 않았으며 간혹 서쪽으로 고국을 바라보며
泣下數行.
몇 줄기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遂賞鯤以廣寧美娃後紫雲,
마침내 광녕의 미인인 후자운을 상을 주고서
近住於運籌堂外.
운주당 밖에서 근접하여 살도록 했다.
其愛將耿仲明孔有德,
총애하는 장수인 경중명(耿仲明)과 공유덕(孔有德)와
작은 잔치를 열 때면 명곤이 항상 자리에 있었다.
後毛都督爲中朝袁崇煥所殺.
훗날 모도독은 중국의 원숭환에게 살해를 당했다.
及至丙丁之間, 紅酋東蹂,
병자와 정축년 사이(1636~37)에 이르러 청나라 태종이 우리나라를 유린하고
廻兵襲取椵島, 島兵見劉.
병사를 회군하여 가도를 기습하여 취하니 가도의 병사들은 죽임을 당했다.
鯤於亂兵中, 失其家人,
난리 중에 명곤은 가족을 잃고
逃竄海嶼.
마침내 바다의 섬으로 숨어들었다.
轉至于江陵海邊, 寄身漁家,
강릉의 해변을 전전하며 어부의 집에 더부살이 했고
其主翁死, 孑孑無依,
주인이 죽자 혈혈단신 의지할 곳 없어
遂還漢陽,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고
旋入松都, 依於馬僉知某.
개성으로 돌아 들어가 마첨지 아무개에게 의지했다.
或於遊宴, 試彈琵琶,
혹 놀이로 베푼 잔치에 시범삼아 거문고를 타면
大爲座客延譽.
크게 청중들에게 명예를 널리 떨쳤다.
俄而馬老亦死, 翻向海右,
갑자기 마첨지 또한 죽어 황해도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장연의 금사사에 이르러 기랍 해청스님에게 의지했다.
以海淸使事, 到載寧延津田舍, 謂余曰:
해청스님의 심부름으로 재녕 연진의 농가에 이르렀고 나에게 말했다.
“상사가 병에 걸려 여기에 기거한다는 걸 듣고 곤궁한 마을을 찾아왔고
欲得一語, 敍我始泰終否之狀.”
저의 처음엔 영화롭다가 끝내 불운해진 상황을 서술한 한 마디 말을 얻고자 합니다.”
余仰而有間曰:
나는 우러러보다가 틈을 얻어 말했다.
“爾言, 吁可悲哉!
“당신의 말이 아! 슬픕니다.
否泰相交, 理所然矣.
불운과 영화로움이 서로 교차하는 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입니다.
옛적에 사마 백거이가 비파 타는 여자의 원망하는 하소연을 들은 것과
亦猶爾也.”
또한 유사할 뿐입니다.”
遂用白公韻, 名以「後琵琶」行.
마침내 백거이의 운자를 사용하여 「후비파행」이라 이름지었다.
인용
- 모도독(毛都督): 모문룡(毛文龍) : 명(明) 나라의 장군. 청병(淸兵)에게 패하자 가도(椵島)를 점령하고 청과 항전하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물자의 공급을 강요하는 등 상당히 괴롭혔었는데 명 나라의 어사(御史)인 원숭환(袁崇煥)에 의하여 살해되었음. [본문으로]
- 가도(椵島):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 있는 섬으로, 단도(椴島)라고도 한다. 광해군 13년(1621)에 청나라 태종이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명나라의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있던 모문룡(毛文龍)이 의주(義州)로 쫓겨 왔다가 이듬해에 가도에 진을 세우고는 동강진(東江鎭)이라고 칭한 다음, 철산(鐵山), 사량(蛇梁), 신미도(新彌島) 등에 분진(分鎭)을 두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그에게 크게 기대를 걸고 청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모문룡이 청군(淸軍)의 배후를 자주 기습하였으므로 청나라 태종이 인조 5년(1627)에 조선을 침입함과 동시에 가도를 습격하여 모문룡을 신미도로 몰아내었다. 그 뒤 청군이 철병하자 모문룡은 다시 가도로 들어가 웅거해 있으면서 군량이 떨어지면 우리나라로 나와 약탈을 자행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점차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모문룡을 신임하여 총병 좌도독(摠兵左都督)이라는 직함을 주어 청나라를 치게 하였으나, 요동으로 출전하였다가 패하여 역효과가 났다. 이에 요동 경략(遼東經略)으로 있던 원숭환(袁崇煥)을 시켜 인조 7년(1629)에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그를 유인해 죽였다. 그 뒤 모문룡의 부하로 있던 진계성(陳繼盛)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해 있다가 유흥치(劉興治)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그 뒤로는 유흥치가 이곳에 주둔하였다. [본문으로]
- 곡연(曲宴): 예전에, 임금이 궁중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베푸는 작은 잔치를 이르던 말이다. [본문으로]
- 기랍(耆臘): 나이가 많은 승려를 말한다. 출가하여 계(戒)를 받은 해부터 계산하여 그 햇수를 납(臘)이라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본문으로]
- 은심(跟尋) 자취를 따라서 찾아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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