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관습적인 신도비의 문체를 비판하다
이 시는 백락천의 시 「청석(靑石)」을 본떠 지은 것으로, 당시 사회의 허구적이고 의례적인 관습에 대한 것과 당시 거의 칭송 일변도의 내용으로 채워진 신도비명(神道碑銘)의 문체(文體)에 대해 비판한 작품이다.
신흠(申欽)은 『청창연담(晴窓軟談)』에 다음과 같이 권필의 성품과 삶의 여정(旅程)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한사(寒士) 권필(權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는 여장(汝章)으로 참의 권벽(權擘)의 아들이다. 권벽은 문장을 잘했는데 권필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아 약관(弱冠)에 문예(文藝)가 이루어졌다.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시풍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며 지은 작품이 매우 맑고 아름다운데 뒤에 와서 시를 짓는 사람들이 그를 으뜸으로 쳤다. 그런데 그의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가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바람에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廷刑을 받고 북쪽 변경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는데 도성 문을 나가다가 죽고 말았다<권필이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함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윤(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의 시를 찾아내었다. 이에 권필이 친국(親鞫)을 받고 귀양길에 올랐는데,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는데, 원근에서 이를 듣고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됨 역시 소탈하고 무슨 일이든 겁 없이 해치우는 성미였으며 사소한 의절(儀節)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과거 공부도 포기한 채 세상을 도외시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임진왜란을 당해 강화(江華)로 흘러 들어가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는 그를 존경하여 추종하는 자가 날로 문에 이르렀는데, 심지어는 식량을 싸들고 미투리를 삼아 신고 천 리 먼 곳에서 와서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문인들이 죄 없이 그가 죽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한 나머지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과 관계를 끊어 버리는 자들도 많았다. 그의 저술 『석주집(石洲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며 그 문인은 심양(沈陽)이라고 한다[有韋布權韠者 字汝章 參議擘之子也 擘能文章 韠早得家庭之訓 弱冠而藝成 治少陵 所作甚淸艶 後來作詩者 推爲第一 以詩觸時諱 壬子受廷刑 竄北荒 出都門而卒 年四十三 遠近聞者 莫不嗟悼 爲人亦淸疏邁往 不拘少節 棄科業 放浪物外 詩酒自娛 遭壬辰倭警 流寓江華 摳衣者日造門 至有贏糧躡屩 千里而來從者 及其歿也 門人痛其非辜 多捐科擧 與世相絶者 所著石洲集 行于世 有一子 其門人沈惕云].”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하, 이담, 2010년, 170~171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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