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태어난 대로 살지 않을까
다음은 태음인, 소음인의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인데, 너무 진도만 쫓아가면 계속 나오는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익히기에 머리가 피곤하니까,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 가자.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을 이야기하고 나면 다음에는 양인들이 음(陰)의 기운을 익히는 과정, 음인(陰人)들이 양(陽)의 기운을 익히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할까? 그냥 태어난 대로 태양인은 애성(哀性)과 직관만으로, 소양인은 노성(怒性)과 감성만으로, 태음인은 희성(喜性)과 감각만으로, 소음인은 락성(樂性)과 사고만으로 살지 않고 왜 다른 기운을 배우려 할까?
심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한다. “사람은 세 가지의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실제 자신의 모습, 또 하나는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 세 번째는 남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이 세 가지 자기 모습이 일치되는 범위가 넓을수록 사람은 행복하게 느낀다.” 세 가지씩이나 되는 자아상을 가지고, 이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이라……. 만일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짐승이라면, 타고난 천성대로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잘 풀어쓴다. ‘사람은 한 동작에서 노동과 학습과 유희가 동시에 이뤄질 때 행복하다’라고, 남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은 내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에 대한 기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노동이다. 구체적인 성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서 바라는 모습을 만족시키는 것이 학습이다. 내가 점점 내가 바라는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다음으로 현재의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유희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어보았는지? 톰이 잘못을 해서 폴리 아주머니에게 담장을 페인트로 칠하라는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칠을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다가온다. 당연히, 너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묻겠지. 벌받고 있다고 하면 창피하니까, 꾀를 낸다.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마치 놀이라도 하듯이 칠을 한다. 한 번 칠하고 나면 자신이 칠한 것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지긋이 바라보고 씩 한 번 웃기도 하고, 가끔씩 휘파람도 불면서, 친구들이 지켜보니까, 재미있어 보인다. “야, 톰. 나도 한번 칠해보자.” 당연히 거절한다. “야 이 재미있는 걸 왜 너한테 양보하냐?” (물론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지만.) 결국 친구들이 말려든다. “야, 내가 새 낚싯바늘 하나 줄게 한 번 칠해보자.” “나는 예쁜 구슬을 줄게.” 톰은 못 이기는 척 양보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정말 재미있게 칠하는 모습을 보다가, “이제 그만 나머지는 나 혼자 칠할 거야”라고 외친다.
최초의 톰의 노동에는 학습성과 유희성이 배제되었기에 괴로웠다. 그런데 노동과 학습과 유희가 하나가 되면서 즐거운 일이 된다.
모든 사회적 활동이 그렇다. 특히 최근에 시민단체에 좀 관여하면서 그런 면을 강하게 느꼈다. 시민단체 활동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찌 보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어찌 보면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일 때, 활동의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명확해진다.
시민참여 운동이 성공적으로 호응을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점은 그 운동이 과연 노동과 학습과 유희의 삼위일체화(三位一體化)에 얼마나 성공했는가 여부에 따라 갈라진다. 물론 주제가 무엇인지, 시대적 요청에 맞는지가 가장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참여자가 얼마나 주체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가’이다. 그리고 그 주체의식은 참여 행위가 노동성과 학습성과 유희성을 동시에 제공할 때 가장 높아진다.
아이들 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습에 적절한 노동성을 포함해야 한다. 즉 그때그때 구체적 산출물이 적절히 보일 수 있게 학습 과정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학습의 과정에 적당한 정도의 유희적 성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학습이 노동이나 유희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그런 식의 강제 학습은 아이를 학습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마찬가지로 노동은 학습과 유희로부터 소외되지 않아야 하고, 유희는 노동과 학습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노동의 문제는 굳이 예를 들 것도 없고, 유희의 문제로 예를 들자면, 도박중독 같은 것은 노동과 학습으로부터 소외된 유희인 셈이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갔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결국 천기(天機)를 느끼고 성(性)을 따라 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별 부담도 없는 일이다. 정(情)으로 하는 일은 남들이 내게서 바라는 모습에 가까운 일이다. 앞으로 이야기될, 음인이 양의 기운을, 양인이 음의 기운을 습득하는 일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결국 사상의 기운을 원만하게 갖출 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남들과의 갈등이 줄어든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기 때문이다.
사상의학에서 말하는 인간상은 철저하게 사회에서 남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 물론 산속에서 혼자 도 닦고 있는 도인도 체질을 분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체질에 따라 도 닦기에 적합한 방법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입산 이전에 사회적 동물 출신이었기에 말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산속에서 혼자 살았다면 체질을 논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왜 사람이 자신에게 부족한 기운을 채우려 하는가?’라는 처음 질문의 답은 이렇게 내려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한의사들이 가장 진료하기 쉬운 사람은 사회성이 아주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다른 기운을 익히려 하지 않고 자기의 성(性)에만 집착하고 살면 체질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또 오기 쉬운 병증도 뻔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회성이 없으면 또 그렇게 편한 환자는 아닐 것 같다. 접수 때부터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고, 의료인과 환자 사이에 신뢰 구축도, 의견 교환도 쉽지 않을 테니까. 음,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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