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기원으로 올라간 유학자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였습니다. 쓰나요시의 총애하는 가신(家臣) 가운데 야나기자와 요시야스(柳澤吉保, 1658~1714)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신 요시야스가 관할하던 영지에 해결하기 난감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농민이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집과 전답, 게다가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친 것입니다. 그나마 그 농민은 어머니만은 버리지 않고 함께 동행했다고 합니다. 물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해야 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곧 병이 깊이 들었고, 농민은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東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요시야스의 영지로 이송되었고, 마침내 그 아들은 어버이를 유기한 죄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스는 수하에 있는 유학자들을 불러 그의 처벌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니다. 과연 이 농민에 대해 부모 유기죄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유기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농민의 사적인 동기에 주목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주희의 유학 사상이나 이토 진사이의 유학 사상이 반영되어 있지요. 만약 그가 어머니를 유기하려 했더라면, 애초에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구걸을 하면서까지 어머니를 봉양해서 자식의 도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는 점도 참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길가에 버리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 농민은 결코 어머니를 버리려는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 유기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석에 앉아 있던 어느 젊은 유학자가 이 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증상사(增上寺)라는 절에서 젊은 스님들을 가르치다가 절 주지의 추천을 받아 최근에 요시야스의 휘하에 들어온 유학자였습니다.
젊은 유학자는 선배 유학자들과 다른 입장을 요시야스에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기근이 밀어닥친다면 이런 일은 다른 영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사건의 주된 책임은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관료에게 있습니다. 결국 어머니를 유기한 농부의 책임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말석에 앉아 있던 젊은 유학자는 부모 유기죄에 대한 책임을 농민 한 사람의 마음, 즉 그의 사적인 동기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농민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유기하도록 만든 객관적인 정치 상황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요시야스는 젊은 유학자의 발언에 탄복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젊은 유학자가 우리가 곧 살펴보려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06~1728)입니다.
방금 살펴본 일화는 오규 소라이의 유학 사상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그의 철학적 입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라이가 이토 진사이를 포함한 유학의 도덕주의를 넘어서서 유학의 전통을 정치철학으로 다시 읽어내려 했다는 점입니다. 진사이는 주희가 완성했던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정신을 비판했지만, 공자와 맹자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도 공맹의 도덕적 유학의 전제를 인정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진사이에 비해 소라이는 더 먼 과거로 나아갑니다. 그는 공자를 넘어서 요임금과 순임금으로 대표되는 고대의 선왕(先王)들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라이에게 유학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정치철학, 즉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도(道)와 다름없었습니다.
보통 진사이와 소라이의 유학을 모두 고학(古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사이가 개인의 도덕성에 주목하여 경전의 의미를 읽어냈다면, 소라이는 그보다 객관적인 정치철학적 입장에서 경전에 언급된 정치 제도를 읽어내려고 했습니다. 이로써 진사이의 고학을 흔히 고의학(古義學)이라고 부르고, 소라이의 고학을 고문사학(古文辭學)이라고 구별하여 부릅니다. 즉 진사이가 고대 유학 경전의 의미를 탐구한 반면, 소라이는 고증적ㆍ훈고적 입장에서 고대 경전의 내용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소라이는 경전의 글자 하나하나와 경전의 구성 시기 등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고증학적 태도를 중시했습니다. 소라이가 이런 지루한 작업을 중시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방식을 거쳐야만 유학 경전에서 말하려는 당시의 정치적ㆍ사회적 논의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한편 유학 경전에 대한 평가에서 주희와 진사이 그리고 소라이의 관점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가 사서(四書) 중 『중용』과 『대학』을 중시했다면, 진사이는 사서 중 『논어』와 『맹자』를 특히 중시합니다. 이와 달리 소라이는 사서를 넘어서 오히려 육경(六經)의 가치를 더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소라이의 육경 중심주의와 그의 정치철학은 『변도(弁道)』와 『변명(弁名)』이라는 글에 압축되어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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