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정심의 논리와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동정심의 논리’입니다. 근대 서양 윤리학은 칸트(I.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도덕형이상학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칸트는 윤리적 명령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
칸트의 이 말은, 자신이 타인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행동이 누구나 수행해도 좋을 행동인지를 미리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려고 합니다. 칸트는 이럴 때 먼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배고플 때 내 빵을 훔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말이지요. 아마 우리는 이런 행동을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배고프다는 이유로 남의 빵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실 칸트의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이성의 보편적인 판단 능력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형식에 치우친 냉정한 윤리학이 될 위험을 안고 있지요. 더구나 그의 윤리학은 자기 변명이나 기만에 빠질 수 있는 문제점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행동할 거야. 내가 당신에게 했듯이 당신이 나에게 똑같이 행동한다 해도 나는 상관없어.”
이처럼 형식적 일관성 또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윤리학은 일종의 냉소주의로 흐를 위험마저 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관된 이성의 법칙을 추구하는 윤리학은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나 타인을 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바로 여기에, 위험에 빠진 아이를 보자마자 몸을 던져 그 아이를 구하도록 이끄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또는 동정심의 중요한 가치가 놓여 있습니다. 이성적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이 보편적인지 반성하는 것보다.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즉각적인 감정이야말로 더 강한 윤리적 힘을 가진 것이 아닐까요?
중국 인민대학의 <공자연구원>이나 KBS의 <유교, 2500년의 여행>은 이 두 가지 논리를 염두에 두고 유학 사상이 인류 미래의 비전이라고 역설했던 것일까요? 이들의 장밋빛 전망이 정치 논리나 자본 논리에 따라 유학 사상을 표면적으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공자의 이름으로 이런 현상을 치열하게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 사상은 정치적인 압력이나 사상적인 도전에 맞서 굴복하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해왔습니다. 새로운 정치적, 지적 환경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의 논리를 제공할 의무가 유학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공자의 정신이자 12인의 유학자들을 관통하는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이 훤히 알고 있는 예절인데도 태묘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았던 공자의 인간애와 삶에서 만나는 타자에 대한 공자의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리 공자를 높여도 유학 사상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논어』를 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공자적인 것을 되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젠가 정약용의 뒤를 이어 공자의 정신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는 열네 번째 유학자가 등장하게 되지 않을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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