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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평화와 번영의 준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평화와 번영의 준비

건방진방랑자 2022. 1. 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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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와 번영의 준비

 

 

제정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그 기간 중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워낙 길었고 그의 업적이 워낙 화려했던 탓에, 후대의 황제들은 그 빛에 가려 강력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황제라 해도 시민들의 인기를 잃으면 제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네로의 운명은 뻔했다. 다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 운명이 닥쳤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68년 참다못한 군대가 그에게 반항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원로원이 황제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했다. 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전 황제들처럼 살해당하기 전에 자살을 택하는 것뿐이었다.

 

네로의 죽음은 다시 로마의 제위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그전까지의 황제들은 카이사르와 클라우디우스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황제의 계보가 끊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위는 다시 처음처럼 힘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네로가 죽은 이듬해인 69년은 무려 황제로 자처하는 인물이 네 명이나 등장한 탓에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린다.

 

원래 대권 후보로 나선 군벌은 세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실각하고 다른 한 명이 나섰기 때문에 네 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세 후보의 세력 근거지는 어디일까? 알기 어렵지 않다. 당시 가장 중요한 속주들이었던 에스파냐, 갈리아, 이집트다. 세 후보는 각자 자기 지역에서 후보 등록을 하고 황제로 자처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 시에서 그들은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 일어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9~79)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플라우티우스와 더불어 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친 바 있었으니 로마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의 승리가 다행스런 일이었다. 다만 힘으로 제위를 얻은 전례가 생긴 것은 장차 로마의 앞날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에퀴테스 층의 평범한 가문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는 과연 평민의 후손답게 성실하고 검소한 인물이었다. 최고 부자인 로마 황제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치세 내내 긴축재정을 유지했으며, 황실의 경비도 대폭 감축했다. 가끔씩 이런 황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로마는 일찌감치 재정난에 허덕였을 것이다.

 

 

마사다의 비극 수난의 민족 이스라엘인들은 로마 시대에도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한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자 그들은 사진에 보이는 마사다(지금의 이스라엘 사해 서안) 요새로 가서 2년 동안 저항하다가 끝내 전원 자살했다. 당시 이 천연의 요새에는 거대한 저수조와 곡물창고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은 안정되었어도 변방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중앙 권력이 불안한 것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변방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잇달았다. 갈리아의 반란을 어렵사리 진압하자 이번에는 팔레스타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은 바빌론의 유수 이래 또다시 성서에 기록되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로마군의 포위 속에서 예루살렘을 139일 동안 사수하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부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2년 동안 항전하다 로마군의 총공격을 앞두고 960명 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이후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져 살았다. 이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르는데, ‘분산이라는 뜻의 유대어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흩어졌으나 자신들의 신앙과 관습을 늘 유지했다. 그랬기 때문에 유럽 각국에서 온갖 박해와 설움을 받기도 했다(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이 선민의식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력히 보존하는 것을 싫어 했으며, 더구나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유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을 탄압했다). 19세기부터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주의로 단결했고, 그 성과로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을 세웠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불운은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2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재난을 겪어야 했다(이때까지의 로마 황제들 중 아버지의 제위를 아들이 잇는 정상적인 제위 세습은 티투스가 처음

이다). 화려한 상업 도시 폼페이를 매몰시킨 유명한 베수비우스 화산의 대폭발이 발생했던 것이다.

 

티투스의 동생으로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51~96)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원로원을 약화시키고 전제정치를 확립하려 했다. 전제정치가 공포정치로 바뀐 계기는 88년에 일어난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수많은 귀족을 처형했는데, 결국 그 화살은 그에게로 돌아왔다. 자기 궁전에서 원로원의 하수인에게 암살되고 만 것이다.

 

황제의 혈통은 또다시 단절되었다. 원로원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권력을 쥐게 된 것이지만 제정의 시대에 원로원은 이미 설 자리가 없었다. 전제라도 막으려고 원로원은 의원들 중 원로이자 무난하고 원만한 성품의 노인인 네르바(Marcus Coccelius Nerva, 30~98)를 황제로 앉혔으나, 아무래도 임시변통의 성격이 강했다. 네르바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2년 만에 성실하고 유능한 군인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트라야누스(Marcus lipius Trajanus, 53~117).

 

 

빵장수 부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슬픈 비극이었지만, 798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통째로 매몰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로마인들의 생활상은 훨씬 적어졌을 것이다. 폼페이는 수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8세기 중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그림은 폼페이에 살았던 어느 빵장수 부부의 초상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더 이상 정복은 없다

내실 다지기

초기 황제들

평화와 번영의 준비

로마의 평화

서양 문명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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