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로마
유럽 전역에서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원형이 생겨나기 시작할 즈음, 로마도 그 물결에 합류했다. 물론 과거와 같은 통일 제국의 로마도 아니고 서방 제국도 아닌 동방 제국, 즉 동로마다.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두 명의 의사(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판단은 절반만 옳았다. 제국의 수명을 늘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서방 제국을 잃음으로써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유럽 신흥 왕국들과 경쟁하는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동방 로마 제국을 로마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부른다(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 비잔티움인 데서 나온 이름이다).
옛 로마의 화려한 영광은 잃었어도 비잔티움 제국은 여전히 강국이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건국 운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6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유능한 군주가 등장했다. 그는 바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483~565)였다.
아직 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당연히 로마의 부활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라 안을 안정시켜야 했고, 안정을 위해서는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했으며, 기강을 바로잡으려면 법을 정비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법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그 성과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다. 그 자신의 이름에도 가장 걸맞은 작업이었다(로마어로 유스jus는 ‘법’인데, 여기서 법적 정의를 뜻하는 영어의 justice라는 말이 생겼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이렇게 디딤돌을 마련한 이유는 로마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이탈리아가 목표지만 동고트족은 강하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는 너무 멀다. 황제는 아프리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비교적 약한 반달 왕국이 옛 카르타고 땅을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반달족은 수십 년전 로마 시를 함락시키고 잔인한 살육과 파괴를 저질렀으니, 그곳은 사슬의 ‘약한 고리’만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기도 하다. 533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당대의 영웅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5년경~565)를 사령관으로 삼고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 명으로 아프리카 원정군을 편성했다(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질시하고 있었으므로 원정 겸 추방이었을 것이다).
수적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원정군이었으나 이들에게는 ‘무형의 큰 무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대부분이 훈족 출신의 용병이었다는 점이다. 반달족이 고향을 버리고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오게 된 이유가 바로 훈족의 침략 때문이 아니었던가? 과연 꿈에서도 무서운 훈족 병사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쳐들어온 것을 보자 반달군은 사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비잔티움군은 카르타고를 공략한 지 불과 사흘 만에 거뜬히 점령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534년 봄에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황제는 벌써 그다음 프로그램을 짜놓고 있었다. 로마가 없는 로마 제국은 없다! 이게 황제의 생각이었으니 다음 목표는 당연히 이탈리아였다. 그해 가을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독촉으로 또다시 원정을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유럽 전선으로.
원정군은 시칠리아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비잔티움군은 오래전부터 동고트족과의 전쟁을 준비해왔지만, 예상한 대로 그들은 만만치 않았다. 나폴리까지는 그런대로 정복했으나 더 이상의 북진은 어려웠다. 2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로마를 손에 넣었지만, 돌아갈 고향도 없어진 고트족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로마 제국의 고향에서 비잔티움군은 동고트족과 20년에 걸쳐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벨리사리우스는 그 도중에 본국에서 일어난 반란마저 진압해야 했다). 이윽고 554년 비잔티움군은 동고트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오랜 전란으로 이탈리아 전역이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비잔티움군은 동고트의 수도였던 라벤나에 총독을 둠으로써 로마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선언할 수 있었고, 에스파냐의 일부까지 손에 넣었다. 이제 로마의 부활은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죽은 과거를 되살리기에는 제국의 힘이 모자랐고, 더욱이 황제는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의 부활을 위해 신명을 바친 황제이자 라틴 문화권이 배출한 마지막 로마 황제라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죽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지 겨우 3년 만에 이탈리아는 다시 이민족의 손에 넘어갔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롬바르드 왕국을 세우자 제국의 이탈리아 근거지는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비잔티움 본국이 위기에 처하는 사태가 계속되는 바람에 관리가 불가능해졌다. 북쪽에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침략해온 데다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일어나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아간 것이다.
이미 정치적ㆍ문화적ㆍ인종적으로 끝난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계획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이 점을 잘 깨달았던 후대의 비잔티움 황제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사실은 꾸려고 해도 꿀 수 없었다. 제 한 몸 꾸려나가기에도 벅찼으니까. 이미 문명 세계는 지중해권을 벗어나 북쪽으로 확대일로에 있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 제국과는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 법을 만든 황제 중세 초기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은 유럽 세계의 중심이자 최강국이었다. 비잔티움 황제들은 이민족에게 빼앗긴 이탈리아를 되찾기 위해 애썼다. 그림에 나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법전을 만들어 제국을 정비하고 이탈리아를 절반쯤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 그림은 6세기 중반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에 그려진 모자이크화니까 실제로 당시 유스티니아누스의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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