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으로 성장한 공동체
메디나에 도착한 뒤 무함마드는 우선 이곳을 세력 근거지로 만들어 장차 있을 메카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을 따라 메디나로 옮겨온 이주민 집단과 메디나 현지 유력 가문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여러 씨족을 한데 묶어 움마(Umma)라는 종교 공동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조그만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수십 년 뒤 이 움마라는 말은 우마이야라는 강력한 이슬람 왕조의 이름에 실려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원래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신의 명령은 신의 사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 따라서 신도들은 신의 사자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7세기라면 문명의 오지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제정일치 사회가 매우 드문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다시금 태곳적 제정일치 사회가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단순명쾌한 교리 덕분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와 같은 복잡한 종교 논쟁도 없었고 성직자도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알라를 대신하는 라술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심지어 무함마드는 대상 행렬과 인근 촌락을 약탈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이것을 지하드(jihad, 성전)라고 불렀는데, 약탈에 대한 그 독특한 해석은 그대로 이슬람의 율법이 되었다(그래도 그가 약탈한 것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의 재산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메카를 탈출하던 해로부터 632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무함마드가 변화시킨 것은 강산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우선 메디나라는 작은 마을을 이슬람의 강력한 근거지로 성장시켰고, 메카를 정복해 금의환향했으며,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이슬람교로 통합했다. 그의 사후 본격적인 대외정복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도 그렇게 급속히 세계적 규모의 지하드가 시작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죽은 바로 이듬해에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caliph, 아랍어로는 할리파인데, ‘후계자, 대행자’라는 뜻이다) 아부 바크르(Abū Bakr, 573년경~634)는 지하드의 명분으로 대외 정복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여기에는 무함마드의 후계를 놓고 벌어진 다툼을 대외 정복으로 해소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650년까지 20년도 채 못 되는 기간에 이들은 동쪽으로 페르시아, 서쪽으로 이집트와 리비아까지 정복했다. 이제 움마는 공동체가 아닌 제국으로 성장했다.
▲ 최초의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와 함께 앉아 있다. 이들이 단순히 피신 생활을 하는 데 그쳤다면 오늘날의 이슬람교는 없었을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사후 초대 칼리프가 되어 정치와 종교의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종교 토론이었을까, 정치 토론이었을까?
그러나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려면 아직 한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중심 없는 제국은 없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권력의 안정이었다. 아부 바크르를 비롯해 네 명의 칼리프가 지배하던 661년까지의 시기는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에는 칼리프가 세습되지 않고 원로들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제 제국으로 성장한 마당에 추대’라는 고답적인 형식은 걸맞지 않았다. 더구나 워낙 급속도로 정복이 이루어진 탓에 처음부터 권력이 삐걱거렸다. 3대 칼리프 우스만과 4대 칼리프 알리가 연이어 암살되었다.
명쾌한 교리 덕분에 종교가 튼튼하므로 성직자는 없어도 되지만, 현실 정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신생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권력의 안정이 필수적이다. 세습제만큼 안정된 권력이 또 있을까? 알리가 칼리프에 오른 지 1년 만에 부하의 손에 죽자 그와 경쟁하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이제부터 자신이 속한 우마이야 가문이 칼리프를 세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우마이야 왕조(661~750)가 탄생했다. 드디어 움마는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마치 정복을 위해 태어난 듯했다. 왕조 체제로 내실을 다진 이슬람 제국은 문명 세계 전체를 통일하겠다는 기세로 정복 활동을 재개했다. 머잖아 제국은 동쪽으로 인도에 접경했고,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손에 넣어 중앙아시아 일대를 호령하게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카르타고를 넘어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진출했다.
711년 세계의 서쪽 ‘땅끝’에 도달하자 이슬람군의 지휘관 타리크는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방향을 돌리면 북쪽에는 불과 10여 킬로미터 너비밖에 안 되는 해협이 있었고, 그 너머로는 다시 대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타리크는 해협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 온 타리크는 작은 언덕에 군대를 주둔시킨 채 북쪽을 전망했는데, 그 언덕은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자발 알 타리크(‘타리크의 산’)라고 불리게 된다. 그 이름에서 유럽과 아프리카를 가르는 지브롤터 해협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대 그리스인들은 지브롤터 해협의 아프리카 쪽에 있는 바위산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으니까 이슬람의 정복이 없었다면 오늘날 지브롤터 해협은 헤라클레스 해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슬람 명칭인 지브롤터는 해협의 유럽 측에 있는 산이고, 유럽 명칭인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아프리카 측의 산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대륙이 서로 바뀐 것은 정복 주체가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즉 유럽의 그리스는 아프리카 쪽의 산에 유럽식 이름을 붙였고 아프리카 쪽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이슬람은 유럽 쪽의 산에 이슬람식 이름을 붙였다. 해협의 현지(지금의 모로코)에 살았던 부족도 그 해협을 가리키는 나름의 명칭을 가졌겠지만 그것은 후대에 전하지 않는다. 힘이 약하면 제 땅 이름조차 지을 권리가 없다】.
유럽에 이른 이슬람군은 에스파냐의 서고트 왕국까지 정복해 옛 로마 제국에 이어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했던 13세기 몽골 제국도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그쳤다).
한편 동북방으로 나아간 이슬람군은 계속해서 당시 중국 당 제국의 주요 무역로였던 비단길 인근까지 진출했다. 당의 수도 장안에 색목인(色目人, 중국에서 서역인을 부르던 이름)들의 출입이 잦아지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후대의 일이지만, 아라비아인들은 이 무렵에 중국과의 교통을 터놓은 것을 계기로 중국의 문물을 유럽으로 전달하는 문명의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을 통해 중국의 3대 발명품인 화약과 인쇄술, 나침반이 서양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더 후대의 일이지만, 그 3대 발명품은 유럽에서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가 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며, 뒤이은 유럽의 동양 침략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된다.
▲ 슈퍼 베이비 갓 태어난 이슬람 문명이 금세 세계 문명으로 발돋움한 것은 역사의 커다란 미스터리다. 이슬람은 불과 한 세기 만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신기록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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