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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사막의 바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사막의 바람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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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사막의 바람

 

 

로마 제국의 멸망은 유럽에만 큰 파장을 남긴 게 아니었다. 유럽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세계와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는 동유럽 세계로 분립하기 시작할 무렵, 문명의 옛 고향인 오리엔트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오리엔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곳은 유서 깊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그 지역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로마의 속주로 역사를 쌓아온 곳이었으므로 새로운 변화의 주역이 되기는 어려웠다.

 

바람의 진원지는 아라비아 사막, 정확히 말하면 사막의 군데군데에 발달한 오아시스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문명이 태어날 때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구축될 때도, 로마 제국이 바로 인근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지배할 때도, 아라비아의 사막지대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여전히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원시 신앙에 가까운 다신교의 종교에다 문명과 문화의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세계사적 격변은 이 지역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우선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들이 생겨났다. 기껏해야 수백 명 단위의 주민들이 살면서 유목민들을 상대로 장사나 하던 오아시스 주변은 점차 인구가 밀집하면서 농경 생활을 영위하는 정착민의 수가 늘어났다. 오래전부터 이 일대의 주민들에게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졌던 메카가 순례지의 수준을 넘어 도시로 발달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로마 제국 시절부터 무역만큼은 상당히 발달해 있었던 메카에는 점차 낙타를 타고 다니는 뜨내기 상인들 대신 낙타 행렬을 소유하고 부리는 부유한 상인들이 늘어났다. 이미 전통적인 부족사회의 체제로는 도시의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부유한 상인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정치와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낡은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함마드라는 인물이 출현했다.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등 당시 아라비아에 신흥종교로 유입된 종교들은 모두 유일신 종교였다(게다가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교였으니까, 아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선진국의 종교들이기도 했다). 특히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공인한 그리스도교는 오아시스 주민들, 특히 서민들의 가슴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슬람의 천사 흔히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알지만,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를 모태로 탄생했다. 그림은 대천사 지브릴(그리스도교의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는 장면이다. 이슬람교에서는 그리스도와 무함마드를 모두 예언자라고 여긴다(이는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를 근본으로 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알라는 곧 그리스도교의 신이 되는 셈이니 굳이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

 

 

무함마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는 그리스도교는 유일신이라는 중심이 확고한 데다 세계 제국 로마가 승인하고 국교로 삼은 강력한 종교였다. 하지만 그가 접한 그리스도교는 제국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된 아리우스파였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알았다 해도 아리우스파를 더 신봉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하는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인다면 유일 신앙의 이미지가 약해 아라비아에서 또 다른 유일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테니까.

 

무함마드는 그리스도를 신(또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보낸 사자’, 즉 라술(Rasul)일 뿐이라고 여겼다. 마흔이 되던 해인 610년 그는 동굴 속에서 명상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또 한 명의 신의 사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유대교에서는 구약성서만 받아들이고 신약성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성서인 코란에도 구약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는 당시 이집트 쪽에 널리 퍼졌던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에게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의 성립에도 기여했다. 정통 그리스도교(아타나시우스파)는 로마 가톨릭으로 이어져 서유럽 사회의 중추를 형성했고, 이단(아리우스파)은 주변으로 퍼져 그리스도교 세계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이래저래 중세를 그리스도교가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신의 사자라면 당연히 신의 말씀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한다.

 

 

오늘날의 메카 메카는 예로부터 오아시스 무역의 요처이자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이곳을 정복하면서 메카는 유일신을 섬기는 이슬람교의 성지로 탈바꿈한다. 사진은 수많은 이슬람교도가 모여 있는 오늘날 메카의 모습이다. 이슬람교도에게 성지 참배는 평생의 소원이므로 이 많은 사람은 지금 그 소원을 이룬 것이다.

 

 

때마침 도시 사회를 이룬 메카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새 질서를 수립하려면 낡은 질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구체제를 대변하는 부유한 상인들은 무함마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더욱이 알라(Allah, )라는 유일신을 강조하면 메카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우상을 참관하러 오는 순례자들이 발길을 끊을 수도 있었다. 순례자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와 짭짤한 관광 수입도 놓치게 될 터였다.

 

메카의 지배층은 무함마드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나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의 법률이 생겨날 만큼 복수의 전통이 강한 곳, 오늘날까지도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가 자행되는 이 지역에서 탄압이라면 정치적 박해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뜻한다. 포교 이전에 우선 목숨부터 부지해야 했던 무함마드는 622년에 암살 음모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것을 혜지라(Hegina, 이주)라고 부르는데, 이슬람교가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기에 오늘날까지 이슬람교에서는 이해를 이슬람 달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재기를 꿈꾸며 메카에서 교세 확장에 실패한 무함마드가 동료이자 부하이자 제자인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하는 장면이다. 이것을 헤지라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상의 패배였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대세 감각은 옳았다. 그는 메카보다 지주의 세력이 약한 메디나를 기반으로 삼아 이슬람교를 일으키고 훗날 권토중래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사막의 바람

제국으로 성장한 공동체

문명의 충돌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부활한 오리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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