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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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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군 시대인 11~13세기 무렵 유럽의 정세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즉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까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지역은 영국이다. 당시 영국의 역사는 유럽 봉건 체제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대륙에서 중세 초기에 프랑크 왕국이라는 강력한 중심이 생겨났다가 이후 프랑크가 무너지고 중세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권화가 전개되었듯이, 영국에서도 윌리엄의 정복으로 강력한 왕권이 성립했다가 이후 대륙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왕권이 무너지고 귀족들의 분권화가 전개되었다(그 결과가 마그나카르타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 영국 내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한 대륙의 봉건 체제가 단기간에 숙성되었으니, 여러모로 영국의 역사는 유럽 중세사의 축약판에 해당한다.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하면서 영국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앙주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영국 왕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그것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이었다. 대륙에서 중세 사회가 정점에 달한 시기에 대륙의 역사에 편입된 덕분에, 영국은 이 무렵부터 후발 주자의 이득을 톡톡히 보기 시작한다. 후발 주자는 선발 주자가 겪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영국은 대륙에서처럼 봉건제의 폐해가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과정을 우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변방에 위치한 덕분에 영국은 새로운 실험의 무대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 실험은 바로 의회 제도였다.

 

사실 마그나카르타로 왕이 귀족들에게 굴복한 선례부터가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왕마저도 프랑스 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 질서 속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우리 역사에 비유하면,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들이 국왕을 중국 황제의 제후로 간주한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의 왕이라 해도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황제를 섬기는 처지이므로 왕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다. 조선이 중기부터 신권(臣權)이 왕권을 능가하는 관료 국가로 변모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귀족들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존의 아들 헨리 3세가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수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멋대로 세금을 징수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외국인들을 중신으로 기용하고 로마 교황의 눈치나 보면서 실정을 거듭하는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또다시 왕과 귀족들의 대결이 벌어졌고, 또다시 영국 왕실의 체면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1258년 헨리는 40여 년 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귀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들이 제시한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ford)에 합의해야 했다. 이로써 왕권은 귀족들로 구성된 15인 위원회에 넘겨졌으며, 영국의 정치는 사실상 귀족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귀족들의 대표자는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unfor, 1208년경~1265)였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도 역시 프랑스 출신의 외국인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사의 한 쪽을 장식하는 데 그쳐야 할 이 사건을 세계사적으로 중요하게 만든 사람은 헨리 3세 자신이었다. 대를 이은 수치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반란(왕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체포됨으로써 더 큰 망신을 샀다. 1265년 몽포르는 아예 귀족 지배를 제도화하기로 하고 귀족·성직자 도시 대표자들로 통치 기구를 구성했다. 이것이 바로 영국 의회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몽포르는 새 정치 실험의 주역이 될 역사적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사실 몽포르의 개혁은 새로울 게 없다. 귀족ㆍ성직자ㆍ도시 대표들이 국정을 담당한다면 바로 옛 로마 시대의 공화정 체제와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그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도는 새로운 정치 실험이라기보다는 복고적 과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영국 의회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는 새 정치의 예고편이 된다. 이렇게 역사적 평가는 대개 후대의 관점에서 당대와 달리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존으로부터 시작된 무능한 왕들의 계보를 끝장 낼 인물이 출현한 것이다. 그는 바로 헨리 3세의 맏아들인 에드워드 1(Edward , 재위 1272~1307)였다. 그는 원래 몽포르를 지지했으나 귀족 지배를 제도화하려 하자 그만 꼭지가 돌아버렸다. 개혁은 찬성하지만 체제 변혁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했다. 왕실이 유명무실해지면 당장 피해를 볼 사람은 바로 왕위 계승권자인 그 자신이었으니까.

 

뛰어난 무장이기도 한 에드워드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몽포르의 군대를 무찌르고 왕권을 되찾았다. 이로써 몽포르의 정치 실험은 몇 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했고, 에드워드는 아직 왕이 아니었다. 일단 내전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응급조치를 취한 뒤 1270년 그는 십자군 전쟁을 떠났는데, 얼마 못 가 아버지 헨리 3세가 죽은 것은 그에게나 영국에게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1274년에 귀국해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는 숙제로 남아 있던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영국을 확실한 독립 왕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사법과 행정 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왕실 재판소를 설치하고, 각종 법을 제정하고, 귀족을 관료로 임명했다. 사실상 영국의 국제(國制)는 에드워드 시대에 확립되었기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영국은 앙주의 멍에에서 벗어나 비로소 영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에드워드 1세를 사실상 영국의 초대 국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영국이 후대에 길이 자랑하게 될 기구를 창설했다. 바로 의회였다.

 

아무리 귀족들을 관료 집단으로 육성한다 해도 마그나카르타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왕권은 안정되어야 하고, 귀족들의 요구는 수용해야 한다. 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에드워드는 몽포르의 개혁을 약간 변형시키기로 한다. 귀족들의 정치기구를 만들도록 허용하되 그것을 왕의 관할하에 두면 될 게 아닌가? 이리하여 창설된 것이 1295년의 모델 의회다(의회의 원형이라는 뜻인데, Model Parliament에서 ‘model’이라는 수식어는 후대에 붙인 것이다. 이것을 모범의회라고도 부르지만, 우리말의 모범은 원형보다 본보기를 뜻하므로 모델 의회라고 표기하는 편이 낫다).

 

아이디어는 몽포르에게서 빌렸지만, 에드워드는 의회의 구성을 달리했다. 고위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만 의회를 구성하면 하위 계층의 반발도 반발이거니와 자칫 예전처럼 특권 귀족들의 전횡이 생겨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각 지방의 기사들과 시민 대표들도 의회로 부르고 하급 성직자들도 포함시켰다. 그러나 지체 높고 자부심이 강한 중앙 귀족과 고위 성직자 들은 지방의 촌놈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회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고위층과 서민 대표로 나뉘어, 전자는 귀족원, 후자는 시민원(평민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이것이 상원과 하원으로 발전하면서 양원제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최초의 의회 마그나카르타의 실질적인 성과는 80년 뒤에야 생겨났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의 의회로 불리는 모델 의회다. 당시 영국이 유럽 문명의 중심지였다면 의회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13세기의 영국은 국왕조차 프랑스 왕을 섬기는 봉건 영주의 하나였을 만큼 유럽 정치 무대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기에 의회라는, 당시로서는 희한한 기구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에드워드 1(오른쪽)와 그가 창설한 모델 의회(왼쪽) 장면을 보여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중심: 절대왕권의 시작

변방과 중심의 대결

영광을 가져온 상처

조연들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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