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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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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자코뱅의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간섭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고, 대내적으로는 왕과 왕당파의 기를 꺾겠다는 것이었다(대내적인 목적을 더 중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영국에 연전연패한 프랑스 군대는 너무 무기력했다(한때 혁명의 지도자였던 라파예트는 오스트리아에 투항함으로써 혁명의 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 머쓱할 만큼 프랑스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군사 강국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고 나섰다.

 

혁명의 위기이자 프랑스 전체의 위기였다. 자코뱅은 전국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이미 혁명의 맛을 본 프랑스 국민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호소에 적극 호응해 속속 파리로 모여들었다조국이라는 말에서 당시 유럽에 국가의 개념이 확실히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 30년 전쟁에서부터 유럽 세계에는 개별 국가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그것은 주로 지배층의 이념일 뿐이었다(영토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서 당장 이익을 보는 것은 그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이제 유럽 각국에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이 퍼지게 된다. 이때 마르세유의 의용군이 행군하면서 부른 노래는 오늘날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La Marsellaise)>였다.

 

자코뱅은 최소한 한 가지 목적을 이루었다. 처음부터 전쟁에 반대한 왕당파와 루이는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려다가 그만 들통이나고 말았다. 성난 민중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친위병들을 살해하고 왕을 체포한 다음 왕권의 정지를 요구했다. 자코뱅은 이참에 왕권을 정지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폐지하기로 했다. 17929월 자코뱅은 입법의회를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로 바꾸고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로마 공화정이 무너진 이래 거의 2000년 만에 유럽 세계에 다시 공화정이 부활한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었다.

 

 

국제전의 조짐 1793121일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루이 16세가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한 사람이 단두대로 잘린 왕의 머리를 쳐들고 있다. 루이의 처형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전까지 유럽의 보수 세력인 오스트리아만을 상대로 했던 혁명전쟁에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가톨릭이 아닌 국가들까지 개입하게 된 것은 이 사건 때문이었다. 또다시 유럽 세계에는 대규모 국제전의 조짐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혁명의 지도부가 또다시 분립했다. 왕당파는 완전히 몰락했지만, 이제 공화파가 둘로 갈렸다. 기층 민중과 소시민을 대변하는 세력은 그대로 자코뱅으로 남았고자코뱅의 이념에 따르는 당시 프랑스의 소시민층은 자신들을 상퀼로트(sans culotte)라고 불렀다. 이 말은 퀼로트(반바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귀족이나 상층 부르주아지가 반바지를 즐겨 입은 데서 비롯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상퀼로트라는 이름을 자조적으로 부르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프랑스 민중이 신분제를 감정으로만이 아닌 이성으로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고용 노동을 거부한 점에서,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목표로 한 지롱드의 이념과 크게 달랐다. 상퀼로트에서 싹튼 이념은 얼마 뒤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 이념으로 이어지게 된다(마르크스는 이것을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르면서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시켰으나 후자의 사상적 뿌리가 전자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상층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자유주의 세력은 지롱드파를 구성해 딴살림을 꾸렸다. 입헌군주파인 푀양파가 떨어져나가면서 군주파로 변신했듯이 지롱드도 보수화되면서 옛 왕당파의 이념까지 일부 수용했다. 양측은 반역자의 처리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그 반역자란 다름 아닌 얼마 전까지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반역자는 사형이다. 이 점을 잘 알기에 지롱드는 재판을 질질 끌려 했고, 자코뱅은 속전속결로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국이라면 또 몰라도 공화국에서 왕은 필요 없는 존재였고, 게다가 루이는 대역죄인이었다. 17931월 자코뱅은 집요하게 반대하는 지롱드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국민공회에서 루이 부부의 처형을 가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지롱드는 몰락하고 자코뱅은 권력을 확고히 다졌으나 프랑스에 쏠린 유럽 각국의 관심이 이것을 계기로 일제히 적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국왕이 처형된 사례는 150년 전 영국의 찰스 1세가 먼저였지만 루이의 처형이 남긴 파장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럽을 한 나라에 비유한다면 찰스의 경우는 지방 군수가 처형된 것이지만 루이는 말 그대로 한 나라의 왕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 처형된 격이었다. 여기서 다른 나라들은 귀족에 해당한다. 왕을 살해한 반란을 그냥 두고 볼 귀족은 없다. 즉각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의 세 귀족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혁명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7년 전쟁이 끝난 지 50년도 채 못 되어 다시 유럽 세계는 대규모의 국제전에 돌입한 것이다.

 

 

비난받는 타협 1791년의 헌법은 완전한 공화정을 구현하지 못하고 입헌군주제라는 절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타협의 산물인 만큼 누구도 헌법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림은 새 헌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귀족과 평민, 성직자가 두드려대는 모습이다.

 

 

프랑스의 새 공화 정부는 바깥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혁명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바깥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권력을 잡은 이상 안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자코뱅의 리더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포정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름도 서슬 퍼런 공안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롱드파를 비롯한 반혁명분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이어 그는 국민총동원령(8)과 최고가격령(9)으로 전시 체제를 갖춘 다음 공식적으로 혁명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것으로 공포정치는 합법적인 면허를 얻었다(오늘날로 치면 비상계엄이 상시화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반대파를 제거한 뒤에 떨어진 공포의 면허장은 그 쓰임새가 원래 의도보다 확대될 가능성이 높았다. 달력을 제정하는 온건한 활동이 달력은 공화력(共和曆)이라고 부르는데, 17931124일부터 적용되어 1806년까지 존속했다. 1년을 12개월로 한 것은 그전까지 사용한 그레고리력과 같았으나 공화력에서는 각 달의 이름을 포도, 안개, 보리, 눈 등 그 달의 특징에서 따온 이름으로 바꾸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지만 한 달을 30일로 고정하고 남는 5일을 마지막 달에 추가한 방식은 이후 역사 기록에서 날짜의 혼선을 빚었다. 그래서 1793년부터 1806년까지의 프랑스 역사는 공화력으로 환산해야만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다으로 국가 운영을 시작한 혁명 정부는 이내 본격적인 공포 체제를 가동시켰다. 그에 따라 공안의 칼날은 차츰 바깥보다 안을 향하게 되었다.

 

혁명정부의 노력으로 대외 전선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혁명 이후 내내 불안했던 경제도 다소 회복되자 혁명 주도 세력 내부에도 이견이 생겨났다. 입헌군주파와 공화파, 푀양파와 자코뱅파,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혁명의 발발 이후 이렇게 분립해오는 동안 혁명 세력은 점차 색깔이 선명해졌고, 혁명의 노선 역시 확고해졌다. 따라서 이제는 공화제라는 정치 체제와 기층 민중을 기반으로 한다는 계급적 이념의 면에서는 누구도 의문을 달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혁명의 진전 속도였다.

 

이 문제를 두고 혁명 세력은, 일단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으니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내친 김에 수백 년간 진보의 발목을 잡아온 그리스도교마저 폐지하고 근대적 합리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급진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 로베스피에르는 그것을 혁명 세력의 분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1794년 봄에 양 파의 보스인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과 에베르(Jacques-René Hébert, 1757~1794)를 처형해버렸는데, 그것은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둔 프랑스 혁명의 5년을 물거품으로 만든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살벌한 달력 표시 프랑스 혁명기에 반포된 공화력의 표지다. 신생국이 달력부터 손보는 것은 동서고금에 마찬가지다. 표지에 보이는 공화국의 통일과 단결, 자유ㆍ평등ㆍ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선연한 문구가 혁명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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