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세티즘
마르시온(Marcion, ?~160)의 세계관에 있어서는 인간은 영ㆍ육이 모두 전적으로 창조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영혼 만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빛의 세계로 귀향하는 드라마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고차원 하나님(the high God)이 있다. 이 고차원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가 격절되는, 전혀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물론 창조된 이 세계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 고차원의 하나님은 완벽한 선의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계로 파견하여 인간을 전적으로 구원하여 새로운 고향으로 데리고 간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대속의 희생이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클레임의 권리를 무효화시키는 법적 선포이다. 인간은 비밀스러운 그노시스에 의하여 이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한 믿음으로써 이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창조의 하나님인 구약의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는 원래 이 세계의 창조와 관련없는 무규정적인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계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에 속한 육신의 옷을 입을 수가 없다. 그가 육신의 옷을 입게되면 인간과 똑같은 피조물이 되며 따라서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 그는 그냥 갈릴리에 현현하였을 뿐이며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적은 사람의 몸의 행적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이론적 결구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예수의 존재는 도세티즘(Docetism), 즉 가현론(假現論)의 소산이 되어버리고 만다. 바로 이 점이 마르시온(Marcion, ?~160)이 영지주의로 몰리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과연 가현론과 영지주의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유체계들일까? 마르시온은 과연 가현론을 부르짖었을까?
철학사에서는 어떤 사상가가 이단으로 몰렸다고 해서 그 사상마저 폄하되거나 왜곡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지만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통하여 만고에 빛난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에 의하여 저주스러운 파문의 고통을 당했지만 그의 저작들은 근세철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해서 그의 사문(斯文)에 대한 혁혁한 공로가 감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교사에서는 한번 이단으로 찍히면 영원히 이단이다. 한번 사문난적이 되면 그의 모든 것이 말살되고 복원의 길은 요원해진다. 선죽교에 피를 흘린 역적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다시 충신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그런 일은 없다.
인간에게 구원과 자유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신약이었지만, 그 신약의 하나님의 역사 또한 이단자들에 대해 너무 가혹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공인 이전부터 이미 정통과 이단의 싸움은 극렬했다. 그러나 마르시온 시대만 해도 아직 가톨릭 교회와 정치권력의 밀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2~4세기에 걸친 정통ㆍ이단의 싸움은 혼란스러웠고 창조적이었다. 그러나 가톨릭 정통파들은 착실하게 그 세력기반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144년 로마교회가 마르시온을 파문했을 때 로마교회당국은 마르시온이 기부한 20만 세스터스를 돌려주었다. 요즈음 같으면 파문을 해도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돈은 돌려줄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그 시절은 순수의 시대였던 것 같다. 돈을 돌려받고 파문당한 마르시온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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