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의 십자가
우리가 기독교문명을 접하기 이전에도 이미 ‘죽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지는 우리 주변에 무수히 깔려있었던 이야기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리의 서민들은 하나의 문학적 상상이나 날조로서 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한 사실이다. 심청이는 정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남들이 하기 어려운 희생의 결정을 내렸고 몸을 팔았다. 죽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나타낸다고 하는 그 여린 여인 심청의 결단처럼 심각한 문제상황은 없다. 분명 그것은 심청의 십자가였다. 그리고 임당수로 몸이 팔려 뱃전에서 떠나가는 가냘픈 심청이의 모습, 뒤늦게 달려와 임당수 해변에서 대성통곡하는 아버지 심봉사의 원성!
심청이 거동봐라 샛별같은 눈을감고 초마자락 무릅쓰고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마기 격으로 떳다 물에가 풍~.
그 빠지는 순간, 어찌 그것이 드라마라, 허구의 가상이라 생각하겠는가? 실제로 우리는 그 순간 심청이와 같이 빠져 죽은 사실적 체험을 하게 된다.
빠져놓니 향화는 풍랑을 쫓고 명월은 해문에 잠겼도다. 영좌도 울고 사공도 울고 격군 화장이 모두 운다. … 닷감어라 어기야 어야어야 우후청강 좋은흥을 묻노라 저백구야 홍요월색이 어느곳고 일강세우네 평생에 너는 어이 한가하느냐 범피창파 높이 떠서 도용도용 떠나간다.
김소희 선생의 청아한 진양의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질 때 나 어린 도올은 매번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뻔히 아는 이야기일지라도 심청의 죽음은 나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믿는’ 자에게 그만큼 감동은 크다. 그리고 그녀가 연꽃에서 부활했을 때, 그리고 가까스로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그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유앙겔리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전통적으로 헬라세계에서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란 단어가 가장 극적으로 보편적으로 쓰인 곳은 전승(戰勝)의 소식 장면이었다.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년 9월)의 승전보를 가지고 26마일을 달려온 아테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마지막 외침이 곧 유앙겔리온이었다. 예루살렘 도성이 다 파괴되고 모든 신념과 자존이 파괴된 참담한 심령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승리를 알리는 승전보가 곧 가스펠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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