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1장 - 2. 도엔 도가와 유가의 구분이 없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1장 - 2. 도엔 도가와 유가의 구분이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5:08
728x90
반응형

12. 도엔 도가와 유가의 구분이 없다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고 하고
 
, 猶令也. , 卽理也. 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은 령()과 같다. ()은 곧 리().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낳아 기름에 기()는 형체를 만들고, () 또한 부여 받으니, 명령을 받은 것과 같다. 이에 사람과 사물이 태어남은 각각 그 부여받은 리()를 얻음에 따라 건순과 오상의 덕을 삼았으니, 이것을 성()이라고 말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이 말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별한 정의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라는 것은 하늘이 명령해서 인간이란 존재에게 부여하는 것이며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천법도 도법자연(天法道 道法自然)’처럼 하늘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므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率性之謂道
자기에게 내재하는 이 성()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도()라 하고
 
, 循也. , 猶路也. 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은 따르다는 것이다. ()는 로()와 같다. 사람과 사물은 각각 그 본성의 자연함을 따르니, 일용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가야만 할 길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을 도()라고 말한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그래서 자기에게 내재하는 이 성()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분명히 물리적 법칙은 아닙니다. ()라는 것은 길(The way)이요 길이라는 것은 하나의 법칙의 세계를 말하므로 중용(中庸)이 과학(Science)의 텍스트였다면 여기서 도()는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도()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분명히 문명의 법칙입니다. ()는 문명(Civilized Tao)을 구성합니다. 문명 밖의 자연인 하늘이 끊임없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고 하고, 또 그 자연이 라는 존재로 내재화되어 들어오는 것이 성()인 거지요. 그 성()을 따라서 내가 하는 행동이 도(), 즉 문명의 질서(Order of civilization)입니다.

 

 

 

脩道之謂敎
그 문명의 질서를 닦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
 
, 品節之也. 道雖同, 而氣稟或異, 故不能無過不及之差. 聖人,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若禮樂刑政之屬, 是也.
()는 그것을 품절한다는 것이다. ()과 도()는 비록 같으나, 기질의 품부 받은 것에 따라 혹 다르기 때문에 지나침과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성인은 사람과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따라 그것을 품절하여 천하를 본받으니, 이것을 ()’라고 말한다. 예악형정의 부류와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그 문명의 질서를 닦는 것(Accmulation)을 교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본 구조는 궁극적으로 천()에서부터 교()까지, 즉 자연에서부터 문명의 형성, 교육까지를 하나의 차원(Dimension)으로 엮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노자적으로 말하자면 무위(無爲)의 세계유위(有爲)의 세계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교()는 유위(有爲)의 극치입니다. 무위(無爲)의 세계에서는 교육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의 뿌리를 캐어 들어가면 결국 하늘이라는 무위(無爲)의 세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는 말에는 도가사상이나 유가사상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그러한 세계관이 융합된 이후에 나온 상당히 통합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이런 정도의 언급을 공자의 손자가 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한대(漢代)에나 와야 이루어지는 통합적 세계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냄새가 그래요. 중용(中庸)의 이 세 마디에 배어 있는 사고는 너무도 조직적(Systematic)이고 총체적입니다. 이 구절은 굉장히 간단한 말처럼 보이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국문명 전체를 포괄하는 명언 중에 명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중용(中庸)이라는 책은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용(中庸)은 오늘날 행동심리학자들이 하듯이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규정지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러나 휴먼네이춰가 무엇인가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설명적 언사(to explain away)로서가 아니라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점점 탐구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은 흥미진진한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중용(中庸)에 대한 첫 맛만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는 쭉쭉 해석해 나가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장시간 동안 열심히 강의를 들어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자연과 문명의 가교로서의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도야자 불가수유리야(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라고 했는데, 여기서 도()라는 놈을 따로 끄집어냈습니다. ‘성야자(性也者)’ ‘교야자(敎也者)’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필 도()라는 놈을 끄집어냈을까요? ()과 도()와 교()에서 성()네이춰(Nature)로 교()를 너춰(Nurture)라고 말해 봅시다. ()아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한 것이며 교()는 완전히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 후천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라는 것은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것이 중용(中庸)의 사상적 구조입니다. ()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의 세계에서 기()의 법칙과 질서를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라는 것은 완전히 문명(文明, Civilizadion)입니다. ()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면 교()는 문명(文明)입니다. 아까 주자(朱子) ()에서 보았듯이 예악형정(禮樂刑政)이 교()이기 때문에 성()은 문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과 교()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도 이 양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도가의 도를 자연주의적인 도()라고 하지만 순수하게 오로지 자연 쪽으로만 간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겠죠. 그래서 도가의 성론(性論)도 오늘날 행동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성론이 되어야 하고 자연과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도가를 자연주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그런 자연만 있는 자연주의가 아니라 인간세상의 법칙을 포괄하는 자연주의입니다. 도덕경(道德經)25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말이 있는데 왜 이 자연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스스로 그러한데 이르러야만 도()와 성()이 구현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이 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고 하는 데에서 성()과 교()의 조화가 깨진다는 말이에요. 노자의 자연주의는 그린벨트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연주의라면 마치 그린벨트에 가서 살자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이게 서양의 얄팍한 목가적인 네이춰럴리즘(Naturalism, 자연주의)이죠. 동양에는 그런 목가적인 네이춰럴리즘이 없습니다. 옛날엔 도시든 농촌이든 모두 그린벨트였습니다. 종로에도 자동차가 안 다녔고 서울이고 시골이고 공기는 다 똑같았다는 걸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오늘날의 도시와 농촌의 개념을 가지고 오해를 합니다. 요즘의 그린벨트에는 비교적 스스로 그러한 생태가 많으니까 그걸 동경하는 것뿐입니다. 도시의 소음과 매연에서 벗어나자고 하면서 그린벨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시에는 플라스틱이고 뭐고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 천지인데 그래도 그린벨트에 가면 나무고 뭐고 다 제멋대로 자라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30에 보면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라는 말이 나오는데 결국 도가의 자연주의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품부 받은 성()을 어떻게 스스로 그러하게 발현시키는가 하는 그 조화작용을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성((()의 문제를 여러분들이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동양문화의 가장 중요한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도()라는 것이 가장 중심적인 개념(Central Concept)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라는 것에는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구분이 없다!

 

 

 

 

 

 

 

 

 

 

인용

목차

전문

본문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