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록 신학계의 상식적 담론을 반복함에 불과할지라도, 거룩한 독자들은 마치 내가 성서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오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서 저자의 전달방식을 믿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는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지 그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나 내러티브적 콘텍스트(context, 문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콘텍스트가 아닌 텍스트 그 자체로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의 자기이해에 있어서, 예수님 스스로 ‘나는 순결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선포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동정녀탄생은 의미있는 케리그마가 된다. 그러나 예수는 단 한마디도 그러한 자기 이해를 내비친 적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동정녀 탄생설화와 같은 하찮은 복음서 기사의 진실성에 매달리게 되면 진정한 복음의 내용을 망각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모두 자신을 그의 가정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의 가까운 친속들은 모두 예수를 ‘미친 놈’이라고 생각했다.(막 3:21), 예수는 모친 마리아를 ‘엄마’라고 부르기를 꺼려한다. 엄마와 아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잔치집 같은 이무러운 자리에서도, ‘여자여! 당신이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아주 가혹하게 잘라 말한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애처롭게 쳐다보는 엄마에게 ‘엄마’라는 다정한 말을 건네지 않는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단지 ‘여자여’라는 거리 있는 호칭을 썼을 뿐이다.
사실 순결한 처녀로서의 마리아의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넌센스다.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가 자기 고향 나사렛으로 갔을 때, 안식일에 회당에서 지혜로운 언사와 막강한 권능을 그의 손으로 베푸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그때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동네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한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마태는 요셉으로 표기)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고있지 아니 하냐?’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마 13:55~56)
분명 예수에게는 4형제가 있었다. 야고보(James), 요세(Joses), 유다(Judas), 시몬(Simon), 그리고 ‘누이들’이라는 복수로 보아 최소한 두 명의 자매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최소한 예수를 포함하여 7명의 자식을 낳았다.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은 것처럼, 남은 6명의 자식도 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6명의 자식은 분명 남편 요셉과 동침하여 낳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성서의 기사 그 자체에 의하여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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