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는 젊은 부인
이사야는 유다왕국의 네 임금, 웃시야, 요담, 아하즈, 히스기야를 섬긴 유대민족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상기의 예언은 이사야가 아하즈왕의 이러한 앗시리아 충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아하즈왕에게 하나님의 징표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때 ‘처녀’는 성교를 경험하지 않은 처녀가 아니고, 바로 아하즈왕이 새로 맞이한 젊은 부인을 가리킨다. 아하즈왕의 새 부인이 곧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 하리라고 한 것은 딴 뜻이 아니라 네 아들은 너와 같이 앗시리아 이교숭배를 하는 그런 못된 짓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절대신앙의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그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이 구절을 히브리성경을 읽고 인용한 것이 아니라 셉츄아진트(구약의 알렉산드리아 희랍어역)를 읽고 인용했기 때문이다. 셉츄아진트가 그것을 ‘처녀’로 오역했던 것이다.
그 히브리원어는 ‘알마아’(almâ)인데 그것은 젊은 여자(a young woman)를 뜻한다. 히브리말로 처녀는 ‘베툴라아’이다. 희랍어에 있어서도 ‘알마아’는 ‘네아니스’에, ‘베툴라아’는 ‘파르테노스’(parthenos)에 해당되므로 양자는 혼동될 수가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셉츄아진트가 ‘알마아’(젊은 여자)를 ‘파르테노스’(처녀)로 번역해버린 것이다. 이 단순한 오역이 마태복음 기자의 엉뚱한 오판을 자아냈으나 그것은 오늘까지 신약성서에서 동정녀마리아 탄생 설화를 입증하는, 700여 년 앞을 내다 본 구약의 예언으로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모든 교회에서 뇌까리는 주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암송하면서 매우 신비롭게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신약의 구약인용은 그 대부분이 맥락을 떠난 단장취의(斷章取義)이다. 그래서 신약이라는 문헌을 유대교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경멸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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