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편집에 관한 불교ㆍ기독교의 입장차이
만약 기독교가 이러한 경전편집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기독교의 경전 역시 대장경 이상의 분량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 당대까지 3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축적된 경서의 양은 불교의 아가마(āgama) 전승 못지않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유다서 같은 것은 편지 제일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가 이 편지를 씁니다’(유 1:1)라는 한마디 때문에 27서에 편입된 것이다. 유다는 물론 12사도 중의 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누구인가? ‘야고보의 동생’으로서 유다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예수의 동생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예수의 동생’이 썼다는 이유 하나로, 즉 예수가족주의적 권위의식의 편견 때문에 27서 안에 포함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이름을 걸려면 아예 이렇게 쎈 이름을 거는 것이 행운을 잡는 길일까? 생각해보자! 예수의 동생이라면 갈릴리 나사렛에서 토박이로 큰 사람이며(막 6:3) 오직 아람어만 했을 아주 촌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유창하고 절제있고 구성진 희랍어문장의 편지를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편지내용 자체가 기성교회 체제를 어지럽히는 외부로부터 침입한 카리스마틱한 교사들의 도덕적 해이와 사기성 그리고 반성령적인 분열주의를 폭로하는 강렬한 아폴로지의 작품이며, 집필연대도 영지주의나 기타 이교도적 교설이 팽배하기 시작한 2세기초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야고보의 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교회의 정통주의를 고수하려는 어떤 유대인 기독교도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다. 논지가 매우 철저하게 유대인적인 발상의 틀을 가지고 있다.
27서의 장르는 복음서가 있고, 사도행전이라는 역사서가 있고, 바울의 편지가 있고, 바울 외의 사도의 편지가 있고, 또 사도외의 중요한 교회리더들의 편지가 있고, 또 묵시문학적 판타지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27서적 장르에 끼어 들어올 수 있는 편지나 역사서나 판타지문학이나 복음서 전기문학은 300여 년 동안 축적된 분량으로 말하자면 불교의 초기경전보다 훨씬 많다. 불교의 초기경전은 오히려 신도들 자체끼리의 편지 같은 것은 아가마로 생각치 않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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