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의 단념과 안아트만
그런데 내가 여기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든 미스티시즘의 갖가지 형태들이 표방하는 ‘합일’(合一)이라는 말의 무의미성, 신화성, 기만성에 관한 싯달타의 통찰이다. 도대체 ‘합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흔히 도를 통했다 하는 사람들이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비경 속에 주ㆍ객이 통합되는 합일의 경지를 체득했다’고 지껄이는 얘기들을 수없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합일이라는 말처럼 기만적인 말도 없다.
나는 우주와 합일되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주적 인간으로서, 신적 인간으로서, 전지전능한 인간으로서 경배해야할 것인가?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과 합일이 되었다. 그래 정말 합일이 되었냐? 그래 우주와 합일이 되고 신과 합일이 되어보니 어떻더냐? 그것은 정말 말뿐인, 레토릭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같은 인간도 수염이나 기르고 거룩하게 옷입고 앉아서 우주와 합일이 된 거룩한 경지를 획득했다고 체하기만 하면 그런 사기에 깜빡 죽을 사람들을 수일 내 수천수만 명을 모으기도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인간의 허약이란 바로 그러한 도사나 야바위꾼, 즉 아트만(ātman)과 브라흐만(Brahman)이 합일되었다고 외쳐대는 인간들의 존재를 항시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합일이라는 말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신비주의의 함정이다. 우리는 신의 멧신저라고 야바위치는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서는 아니 되지만, 도통했다고 토굴 속에 앉아있는 스님에게 사기를 당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붓다, 바로 그 존재로부터 사기를 당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불행한 일은 불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로 우리 자신이 붓다를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어느 새인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홀로 도통한 사기꾼으로 변모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이러한 일체감의 확신의 표현의 언사에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분열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합일’이라는 말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일자(一者)가 나의 존재로부터 타자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신의 분열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신의 분열이 전제되어 있는 한, 그 사이에는 영원히 바크티라는 신앙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은 항상 비굴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니이체나 20세기의 래디칼한 진보신학자들처럼 신을 죽여야 할까? 과연 신은 살해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미 이천오륙백년 전에 인도의 청년 싯달타가 던졌던 질문들이다. 과연 신을 죽일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우리의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신을 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는 살해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살해를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니이체처럼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스러지고 말 뿐이다.
여기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계속하면 할수록 무의미해지는 이유는 바로 일자(一者)를 타자화시켰다는 최초의 함정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문제를 나 밖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으로 생각했다는 바로 그 존재의 분열에 모든 문제의 원천(Ursprung)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의 존재 밖에 있는 신을 죽이려 한다면 또 다시 나의 존재의 분열은 점점 심화되어갈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하여 중도의 자각을 얻는 순간, 싯달타는 외쳤을 것이다. 그 해결의 유일한 길은 바로 신을 생각하는 나, 나 아트만(ātman)을 본질적으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상주ㆍ불변ㆍ단일의 동일자가 아트만으로서 나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 그 자체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즉 아트만의 살해가 아닌, 아트만의 무화(無化)인 것이다. 이 아트만의 무화의 방향을 싯달타는 안아트만(anatman), 즉 ‘무아’(無我)라 불렀다. 이 싯달타의 무아의 각성이야말로 인류정신사에 시작도 끝도 없는 최대의 혁명이며, 최고의 비상이며, 모든 종교의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중도의 자각을 얻고 나서 싯달타는 고행을 단념하였다. 그의 몸은 허약하고 쇠약하고 지칠대로 지쳐빠졌다. 그때 시타림에서 6년 간 고락을 같이 했던 카운디냐(憍陳如, Ājñāta Kauṇḍinya) 등 다섯 명의 친구들【憍陳如 등 다섯 명의 친구들이란 싯달타의 아버지 淨飯王이 파송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다섯 명의 정확한 이름은 알 길이 없다. 『中本起經』에는 ‘拘憐(카운디냐=憍陳如), 頞陛(알폐), 拔提(발데), 十力迦葉, 摩南拘利’로 되어있다. 아함에 나타나므로 그 전승이 상당히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전기작가들에 의한 양식적 구성일 것이다. 『마하박가』에도 ‘다섯 비구’라는 표현으로만 등장한다. 이 다섯 비구는 후일 싯달타가 성도한 후에 초전법륜을 득한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고행의 방법을 통하여 같이 해탈을 득하고야 말리라 했던 사나이의 맹약이 깨져버리는 배신감, 그들은 싯달타의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고행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의 도중하차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 다섯 명의 친구들은 고행을 중단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구걸에 나서는 싯달타를 매우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힌두전통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인 카시(Kāshī), 그 빛의 성지(City of Light)인 바라나시(Vārānasī)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바라나시(Varanasi)는 간지스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바라나강(the Varanā River)과 아시강(the Asi River), 두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옛 이름은 카시(Kāshī)이다. 바나라스(Banaras), 베나레스(Benares)라고도 불린다. 카시는 간지스강 유역에 정착한 북인도의 아리안종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카시는 코살라국(the Kosala kingdom)에 편입되었다가 결국 마가다국(the Magadha Empire)으로 복속되었다. 카시의 산스크리트어원(kāsh)에 빛난다(to shine)는 뜻이 있어 보통 ‘빛의 도시’(City of Light)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시바(Shiva)신의 광채가 여기서 빛난다는 뜻이다. 인도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이며 강가(Ganga)의 여신이 사가라(Raja Sagara)의 6만 명의 죽은 아들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하강했다는 전설에 따라, 인도인들은 여기 간지스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서 죽고 가트(Ghat, 강둑)에서 화장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죽기 위한 최상의 장소인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고대도시들이 그 실상인즉슨 근대적 삶으로 다 전환되었지만 카시만은 옛 모습 옛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역사보다 더 오래된 도시’(Benares is older than history.)라 한 재미있는 표현 그대로 태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하바드대학의 인도학교수 에크의 하기서는 바라나시 도시의 모든 것에 관한 훌륭한 보고서이다. Diana L. Eck, Banaras, city of light, New Delhi : Penguin, 1983.】. 그때 싯달타가 느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다섯명의 친구들이 싯달타를 떠나 도착한 카시의 수행지, 나물 캐는 소녀가 그 곳 스투파에서 쑥을 캐고 있었다. 사진을 찍자 나에게 ‘텐 루피’를 달라고 손을 벌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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