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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의 붓다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의 붓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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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의 붓다

 

 

셋째로 우리가 붓다라는 말을 쓸 때, 붓다는 이 모든 부처님들을 묶는 통일된 개념으로서의 추상적 속성, 즉 우리가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불성(佛性, Buddha Nature, Buddhahood)을 의미할 수 있다. 즉 모든 붓다들은 불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불성에 대한 논의는 특히 소승과 대승이 대립적으로 이해되면서 주로 대승계열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점점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어갔다. 그리고 이 불성에 대한 논의는 법신(法身, dharma-kāya)이라든가 여래장(如來藏, thatāgata-garbha)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증폭되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선종(禪宗)도 바로 이 불성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 논의는 너무도 복잡한 많은 문제를 제기하므로 일반독자들을 위하여 일단 접어두려 한다. 우리나라의 원효스님 같은 사람도 바로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탁월한 견해를 제시한 대 사상가였다는 것만 암시해둔다.

 

자아! 우리는 붓다에 관한 세간의 논의를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적 개념에 대한 일반고찰에 따라, 세 가닥으로 정리하여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지금 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보드가야의 저 나이란쟈나강 건너편에 있는 핍팔라나무 때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싯달타는 저 핍팔라나무 아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를 얻고 붓다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앉은 자리는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가 되었고, 핍팔라나무는 보리수(菩提樹, Bodhi Tree: 깨달음의 나무)가 되었다. 그는 과연 핍팔라나무 아래서 그것을 했길래 붓다가 되었나? 나도 싯달타처럼 핍팔라나무 아래서 가부좌 틀고 7주 정도만 앉아있으면 붓다가 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지금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스투파(Mahabodhi Stupa)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불자들은 너무도 쉽게 일상적으로 성불’(成佛)이라는 말을 쓴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 인사말로도 성불하십시요하기도 하고, 절깐 이름도 성불사가 많고, 또 유명한 가곡도 있다. 그런데 이 성불이란 말은, ‘부처님이 된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과연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불이라는 말을 그렇게 일상적으로 쓰는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 불교문화가 선종(禪宗)을 적통으로 하고 있는 특이한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선종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매우 특이한 이론을 그 캣치프레이즈로 가지고 있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라! 그리고 너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라! 그리하면 너는 곧 부처가 될 것이다. 여기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성()은 앞서 말한 불성(佛性)을 말한다. 불성을 견()한다는 것은, 곧 우리 존재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아주 쉽게 말하면 나는 원래 부처였는데, 내가 곧 부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곧 부처라고 하는 나의 본성을 견하면 곧 나는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성불이란 곧 부처가 된다’(to become a Buddha)이다. 이러한 논의는 앞서 말한 여래장론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존재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불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성불에 대한 그러한 쉬운 해결은 곧 나 속에 있는 불성의 건재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불교의 최고 법인(法印)이라고 할 수 있는 무아론’(無我論)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다. 불성을 전제로 할 수 있는 아()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본래적 아와 오염된 아의 이원적 구분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선은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하여 매우 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질문을 지배하는 분별적 사유, 그것이 곧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매우 교묘한 이론이 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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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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