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달타와 예수의 유혹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원작소설을 기초로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감독이 연출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작자 카잔차키스는 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중적 실체성, 인성과 초인성의 갈등, 인간이면서 신이 되고자 했던 그 갈망, 그러한 것들은 항상 나에겐 풀 수 없는 심오한 신비였다. 어릴 때부터 카톨릭신도였던 나에게 다가온 모든 기쁨과 슬픔의 근원과 원천적 고뇌는 영혼과 육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그리고 잔인한 싸움이었다. 나의 영혼은 이 두 개의 적진이 충돌하여 싸우는 각축장이었다.
The dual substance of Christ ― the yearning, so human, so superhuman, of man to attain God …… has always been a deep inscrutable mystery to me. My principle anguish and source of all my joys and sorrows from my youth onward has been the incessant, merciless battle between the spirit and the flesh …… and my soul is the arena where these two armies have clashed and met.
예수는 40일간의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기적의 손길을 얻는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며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그리고 호산나를 부르는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럽히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는다. 그리곤 정치적 혁명을 꿈꾸었던 가장 친했던 친구 가롯 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해줄 것을 간청한다. 그는 로마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만들던 목수였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어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만 한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가롯 유다가 데리고 온 로마병정에게 끌려가기 전, 겟세마네동산에서 울부짖는다. 꼭 제가 죽어야만 합니까? 딴 길은 없습니까? 하고, 드디어 그는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리고 육신의 엄마 마리아, 사랑하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두 자매, 네 여인을 내려다본다. 극심한 고통 속에 그는 잠깐 혼미 속에 빠진다. 이때 수호천사가 나타난다. 수호천사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이삭을 죽이지 않았다. 단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했을 뿐이다. 나는 너의 피를 원치 않는다. 너의 고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수호천사는 예수의 몸에서 십자가의 못을 뽑는다. 그리고 예수는 수호천사와 함께 걸어간다.
그리곤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 뒤 마리아는 예수의 아기를 낳다가 죽는다. 그 뒤로 예수는 또 나사로의 누이와 결혼한다. 그리고 또 그 언니와 관계를 맺는다. 예수는 많은 아기를 낳고 관계한 모든 여자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늙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었다. 때는 AD 70년! 예루살렘성전이 티투스황제의 명으로 무너지고 전 도시가 약탈되는 시점이었다. 이때 가족에 둘러싸인 예수의 평온한 죽음의 침상에 충직했던 제자 베드로가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를 긍휼히 쳐다본다. 그리고 가롯 유다가 나타난다. 가롯 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탄하면서 예수에게 너는 배신자라고 절규한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야! 나를 제발 배신해주게,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해주게! 형제여.”라는 그대의 속삭임 때문에, 그대를 사랑했기에 그대를 배반했거늘, 그 배신으로 인해서 자기는 끊임없이 배신당했고 또 혁명의 기회를 놓쳤다고 절규하는 것이다. 예수는 저 수호천사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때 가롯 유다는 저 수호천사는 사탄이라고 소리친다. 그 순간, 수호천사는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했던 사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행복한 죽음의 침상에서 비로소 자기가 사탄에게 유혹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때 예수는 발버둥치면서 죽음의 침상을 벗어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호소한다. “아버지!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다시 저에게 십자가를 돌려주십시오. 당신 분부대로 싸웠으나 모르는 사이에 이기적인 자기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고 싶습니다. 다시 메시아가 되고 싶습니다. 주여! 이 탕자를 위한 잔치를 다시 베푸소서!”
이때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제 정신이 든다. 잠깐의 꿈이었던 것이다. 인간 예수에게 다가왔던 마지막 구운몽(九雲夢)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통에 잠겨있는 네 여인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에 소리친다.
"이제 다 이루었다! 모두 다 이루었다!“
이 순간이 예수의 열반이요, 대각이요, 해탈이었을까? 이것이 카잔차키스가 그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다. 핍팔라나무 밑에 앉아있는 싯달타에게 마왕 파피야스(Pāpīyas, 波旬)의 마군들의 맹렬한 침공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싯달타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Siddhārtha)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외로운 자기와의 투쟁이다. 모든 신화나 설화들이 인간 내부의 투쟁을 객관화시켜 드러내 보여주기 위하여, 의식내적 상태를 실체화시키고 인격화시킴으로써 대결구도의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이 통례이다. 싯달타의 마라와의 투쟁도 그러한 드라마적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모든 역정도 결국 자기 자신과의 외로운 투쟁일 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기 위하여 싸웠고, 싯달타는 붓다(깨달은 자)가 되기 위하여 싸웠다. 물론 이 양자간에 가치적 우열을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의 씨움이 카잔차키스의 말대로,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잔인한 싸움’이었다면 예수의 마지막 유혹은 매우 저차원적인 것이다. 그러한 잔인한 싸움은, 이미 싯달타는 중도행을 깨닫는 순간, 시타림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떠났던 것이다. 싯달타의 싸움은 결코 마라와의 싸움은 아니었다. 싯달타의 대각을 묘사하는 말로서 ‘항마성도’(降魔成道: 마귀를 항복 받고 도를 이루었다)라는 말은 심히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매우 저급스러운 표현인 것이다. 그것은 원시불교의 본의를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항마촉지인의 무드라(mudrā, 印相)조차 큰 의미가 없다.
▲ 비슈누(Vishnu)신에게 봉헌된 카주라호의 락슈마나 사원(Lakshmana Temple), 기단부에 있는 미투나상 조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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