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 속의 삼학(三學)
결국 이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ㆍ혜(慧, pañña)라는 삼학(三學)은 저 시타림에서 나이란쟈나강을 건너 저 핍팔라나무 밑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싯달타의 삶의 과정을 요약해놓은 언사인 것이다. 싯달타가 고행(苦行)을 했다는 것도 일종의 계요, 그가 고행을 중단하고 수자타에게 유미죽을 얻어먹고 32호상을 회복했다고 하는 것도 계(戒, sīla)다. 진정한 선정(禪定)이란 건강한 신체(정신을 포괄)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무지 몸이 불건강한 상태에서는 집중력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싯달타가 유미죽을 먹으면서 정갈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32상을 회복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좌도밀교의 수행을 한답시고 우루벨라 마을에 쑤셔 박혀 수자타와 쎅스나 하고 지냈다면 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계(戒, sīla)는 정(定, samādhi)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계를 지킨 싯달타는 핍팔라나무 밑에서 정(定, samādhi)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마라(魔王)의 유혹 정도는 간단히 물리친다. 그리고 12지연기의 지혜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를 증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싯달타의 ‘계(戒, sīla) → 정(定, samādhi) → 혜(慧, pañña)’의 과정은 곧 삼장(三藏)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싯달타의 계를 담은 것이 율장이요, 싯달타의 정을 담아 놓은 것이 경장이요, 싯달타의 혜를 담아 놓은 것이 논장이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ㆍ혜는 반드시 일자가 일방적으로 타자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요, 시간선상의 전ㆍ후 분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것이요, 호상투철(互相透徹)하는 것이다. 계(戒, sīla)는 정(定, samādhi)과 혜(慧, pañña)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몸의 디시플린을 지킨다는 것은 집중력과 지혜(지식)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즉 계 속에는 정과 혜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정(定, samādhi)은 계(戒, sīla)와 혜(慧, pañña)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선정(禪定)을 잘함으로써 계율을 더 잘 지킬 수 있게 되고 더욱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정(定, samādhi) 속에는 계(戒, sīla)와 혜(慧, pañña)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혜(慧, pañña)는 계(戒, sīla)와 정(定, samādhi)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알고 지혜로 와짐으로써 계율을 더 잘 지킬 수 있게 되고 선정의 집중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혜(慧, pañña) 속에는 계(戒, sīla)와 정(定, samādhi)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계율도 그 계율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모르고 지키면 그것은 괴로운 타율적 인생일 수밖에 없다. 계율을 지켜야 하는 소이연을 알면 알수록 계율을 더 바르게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지혜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선정의 집중력은 도수(강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승의 도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계(戒, sīla) 속에 정(定, samādhi)ㆍ혜(慧, pañña)가 있고, 정(定, samādhi) 속에 계(戒, sīla)ㆍ혜(慧, pañña)가 있고, 혜(慧, pañña) 속에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이 있는 이러한 상즉상입의 일체감을 우리가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의 완성은 불교 교리라고 하는 좁은 울타리를 떠나 모든 인간이 행복하고 자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배움의 과정이다. 그래서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ㆍ혜(慧, pañña)를 삼학(三學)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인격의 완성을 위한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세 가지 배움이라는 뜻이다. 원시불교나 대승불교를 막론하고 이 삼학의 정신은 불교의 핵심이다. 지눌이 성적등지(惺寂等持)를 말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말하는 것이 모두 이 삼학의 상즉상입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돈오점수(頓悟漸修)론도 결국 이 삼학의 일체감을 전제로 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지눌의 정신을 이해하려면 그의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를 한번 일별함이 좋다. 지눌의 사상을 잘 해설한 것으로 볼만한 책은, 김형효ㆍ길희성ㆍ허우성ㆍ한형조ㆍ최병헌이 지은 『知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서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단언컨대 싯달타는 불교라는 종교를 개창하기 위하여 산 사람이 아니다. 그의 승가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이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ㆍ혜(慧, pañña)의 프레임웍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승가를 지도하였다는 그 사실이 그를 오늘의 위대한 스승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삼학은 승가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였다. 그것은 인류사의 획기적인 창안이었다. 그것은 바로 싯달타라는 한 역사적 인간의 실천적 삶의 모습이었다. 그 삼학이라는 실천적 삶의 모습의 족적이 오늘의 불교라고 하는 이 거대한 인류사의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 아잔타 제6 석굴의 벽화. 위대한 스승 세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비크슈, 오른손에는 향로를 들고 왼손에는 세개의 연꽃을 들고 있다. 이것은 불법ㆍ승의 삼보를 상징한다. 이런 마음들이 합쳐져서 초기불교의 승가는 형성되어 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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