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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13. 종주(宗主)가 될 수 있으려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13. 종주(宗主)가 될 수 있으려면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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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종주(宗主)가 될 수 있으려면

 

 

1-13.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이 의로움에 가까워야 그 말이 실천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아니 하면 또한 본받을 만하다.”
1-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信近於義 ~ 遠恥辱也

 

노자17신부족언(信不足焉), 유불신언(有不信焉)’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신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발굴된 마왕퇴 백서본과 곽점 죽간본의 출현은 이러한 평범한 해석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모두 신부족(信不足), 안유불신(安有不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믿음이 부족하다. 어찌 불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가 된다. 도무지 그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해석이 곤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선진문헌에서 ()’의 의미는 곧 인간의 이다. ()은 곧 언()인 것이다. ()은 인간의 말의 신험성(verifiability)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유불신(安有不信)’의 불신(不信)은 불언(不言)이며, 그것은 곧 노자가 말하는 불언지교(不言之敎)가 된다. ‘신부족(信不足), (유불신安有不信)?’은 이렇게 해석된다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믿음이 결여되어 있는데 어찌 불언지교(不言之敎)가 가능하겠는가?자세한 것은 나의 노자와 21세기17장 해석을 참고.

 

이 장의 신근어의(信近於義), 언가복야(言可復也)’의 신()과 언()은 결국 같은 단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인간의 믿음은 모두 말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약속도 결국 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해석은 이와 같다. 약속이라구 다 약속이냐? 그 약속이 의()에 가까운 것이래야, 즉 의로운 것이래야 지킬 만한 것이 아닌가? 약속을 그냥 로 새겨도 상관없다. 인간의 말이란 의로운 것이래야 그 말이 되풀이되어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 공손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손한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손한 자일수록 위선자가 많고 향원(鄕原, 양화(陽貨)13)과 같은 비속한 자들이 많을 수도 있다. 공손함도 예()에 가까워야만 비로소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문을 좀 뉘앙스를 달리하여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이 의에 가까운 것이라야 ……라는 식으로 신을 유보상태에 놓지를 않고, 신을 처음부터 긍정적인 맥락에서 푸는 것이다. 신은 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신()한 말[]은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신이 곧 의는 아니지만 의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공근어례(恭近於禮), 원치욕야(遠恥辱也)’도 마찬가지다: 공손함이 예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에 가까운 것이므로, 사람이 공손하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해석에서는 신()과 공()의 부정적 함의의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因不失其親의 다양한 해석

 

그런데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다음의 인부실기친(因不失其親), 역가종야(亦可宗也)’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인()을 친인척을 뜻하는 인()과 상통하는 글자로 보고, 친인척사람들이 그 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즉 부모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종주로 삼을 만하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부모에게 잘하는 친인척은 들어줄 만하다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인()을 자기 부인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편협한 해석을 내렸다: ‘결혼한 여자가 시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비로소 종씨로 간주할 만하다.’

그리고 또 어떤 주석가는 인()을 처가계의 일족으로 보고 친()을 친가의 일족으로 보아 재미있는 해석을 내린다. 즉 처가계의 일족을 사귀는 태도가 부모님을 위시한 친가계의 일족을 대하는 친근함을 넘어가지 않는 정도로 사귀는 사람은 대소가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지나치게 후대의 가족관계의 에토스를 공자시대의 가족관계에 덮어 씌우는 꼴이 되어 별로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주자의 소박한 해석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주자는 인()의지하려고 하는 사람정도로 새겼다. 지금 내가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에게 가깝게 있는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잃지 않는다면, 즉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평생 종주(宗主)로서 받들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이다 라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가깝게 있는 자들로부터 과연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는 좀 다른 해석을 내렸다. 앞뒤 문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중시하여, ()을 앞 문장의 내용을 받는 전치사로서 새긴 것이다. 그러면 인신공이부실기친(因信恭而不失其親)’의 맥락으로 해석되고 마는 것이다. ()하 고 공()한 덕성으로 인하여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않는다면의 뜻이 될 것이다. 여기서 ()’도 꼭 부모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모로 시작해서 친척, 그리고 가까운 친지, 친구들 나에게서 가까운 연줄의 사람들에 대한 일반 명사로 보면 될 것이다. 주자도 ()’가친지인(可親之人, 가까운 사람들)’으로 일반화시켰다. 혈연관계라기보다는 그냥 교제상에서 친할 수 있는 사람정도로 새긴 것이다. ‘()’은 동사로서 종주로 모신다, 섬긴다, 받든다의 뜻이다. 평범하게 말하면 존경하다의 뜻이다. 나는 본받을 만하다라고 번역하였다.

 

因不失其親亦可宗也
다양한 해석
친인척 사람들이 그 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종주로 삼을 만하다.
결혼한 여자가 시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비로소 宗氏로 간주할 만하다.
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아니하면 또한 본받을 만하다.
주인을 삼는데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종주가 될 수 있다

 

 

가까운 사람에 존경받는 인간

 

예수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마태13:57, 마가6:4, 누가4:24, 도마31).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r except in his own country and in his own house.

 

 

예수는 왜 자기고향 나자렛에서, 그리고 친지의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했는가? 우리는 과연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이러한 예수의 말을 만고의 진리처럼 되씹어야만 할 것인가?

 

예수가 고향에서 대접(환영)받지 못한 것은 그 이유가 너무도 간단하다. 너무도 엉뚱한 짓만 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엉뚱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의 언행은 일상적 존경(daily esteem)의 대상이 아니라 충격이요, 외경이요, 이상(異常)이요, 기적적 권능이었다.

 

예수가 그의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 것은 그 이유가 간단하다. 결국 예수는 소인유(小人儒)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리스도화 되어버린 케리그마적 기술 속에서는 그는 소인유의 세계를 근원적으로 탈피하지 못했다. 공자가 소인유의 세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면, 예수는 소유의 괴력난신(怪力亂神)의 권능의 세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치유자(healer)로서의 예수의 이미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무속적 세계 속에서, 그러한 판타지 속에서 진정하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이 예수의 천국운동이었다. 그것은 사실 그가 살았던 중동문명권의 언 어였고 삶의 양식(Forms of Life)이었고, 가치였고, 힘이었다. 그가 아무리 공자와 같이 대인유(大人儒)의 인문주의적 호학(好學)의 스승으로 머물고 싶었다해도, 그의 실존을 둘러싼 문화적 맥락에서는 그것은 별의미가 없는 진부한 범용(banality)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의 경우, 그가 추구한 대인유(大人儒)의 세계는 상식과의 괴리가 없다. 자연적 질서의 파괴를 초래하는 초자연적 계기가 없어도 얼마든지 강력한 케리그마를 던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존경을 받는 인간이 될 것을 권유한다. 예수의 기적도 좋다. 예수의 소피아(지혜), 예수의 뒤나미스(dynamis, 권능), 그 궁극적 의미는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는데 있다[不失其親]고 권유한다.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 자는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없다고 유교는 가르친다. 나의 체험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같이 큰 또래 아이들은, 지금의 나의 학문의 세계를 실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격언을 푸념처럼 뇌까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진정으로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겸손하고 인내하며 더욱더 큰 실력을 축적하여 가까운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를, 아내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야말로 지난(至難)의 일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를 이 장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항상 이렇게 우리의 범용의 허()를 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고향에서 대접받는 선지자는 없다는 식의 가치명제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통념을 하루속히 타파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만 의미 있었던 맥락적 언어였던 것이다. 진리는 끊임없이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상으로 유자(有子)라는 존칭으로 된 3개의 로기온자료가 모두 검토되었다. 논어전편을 통하여 공자 외로 공자의 제자를 ()’로 부른 파편이 20개 있다. 그 중 증자(曾子)’14개를 점하고 유자3개가 있는데, 유자의 것은 모두 이 학이(學而)편에 수록된 것이다. 그만큼 유자학파와 학이편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노나라 적통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유자외로 유약(有若)’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파편이 안연에 나오고 있는데, 유약이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민본주의적 의식이 투철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본편의 3자료를 검토해보아도 유약은 개념적인 틀이 있었던 사람이고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 이론적 관심이 있었던 사람 같다. 비록 노나라의 공문적통이 증자에게로 옮겨갔다고는 하지만, 유자의 이론적 측면은 자사(子思)ㆍ맹자(孟子) 계열로도 계승되어 내려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 같다.

 

증자왈(曾子曰)’, ‘유자왈(有子曰)’의 경우, ‘자왈(子曰)’과 구분하기 위하여 번역문에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 ‘()’이 모두 거성이다. ()’이란 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사물의 마땅함이다. ‘()’이란 그 말이 실천된다는 것이다. ‘()’이란 공경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다. ‘()’란 절도에 맞는 질서감각이다. ‘()’이란 의지하 고자 함이다. ‘()’이란 주인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언약이 신험하여 그 마땅함에 들어맞으면 그 말은 반드시 실천되어질 수 있다. 공경을 지극하게 하면서도 그 공경이 절도에 들어맞으면 능히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내가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까운 사람들의 존경심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은 종주로서 받들어 모실 수가 있다. 이 장의 말씀은 사람의 언행과 교제가 모두 마땅히 그 처음을 신중하게 하여 그 마침까지를 사려깊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인습하고 구차스럽게 지내는 동안에 장차 스스로 지조를 잃었다는 후회를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 皆去聲. , 約信也. 義者, 事之宜也. , 踐言也. , 致敬也. , 節文也. , 猶依也. , 猶主也. 言約信而合其宜, 則言必可踐矣. 致恭而中其節, 則能遠恥辱矣. 所依者不失其可親之人, 則亦可以宗而主之矣. 此言人之言行交際, 皆當謹之於始而慮其所終, 不然, 則因仍苟且之間, 將有不勝其自失之悔者矣.

 

 

인잉(因仍)’이란 인순(因循)의 뜻이다. 어정쩡 벌어진 사태를 개선이나 결단 없이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유자의 말에서 가종(可宗)’을 풀이하는 주자의 레퍼런스에는 공자의 유랑생활이 전제되어 있다. 어디로 가든지 몸을 기탁할 때는 그 기탁하는 사람을 종주(宗主)로 삼는 것이다. 아무 곳에 나 생각없이 내 몸을 기탁했을 때, 스스로 지조를 잃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잘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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