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
“우선 『예수의 신비』의 저자들은 4복음서가 모두 사도바울의 편지 이후에 성립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들의 새로운 창안이 아니고 매우 정통적인, 그러니까 초대교회사를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예수의 전기로서 우리는 우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세 복음서는 공통된 관점에서, 그러니까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세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공관복음서의 원형을 이루는 「마가복음」조차도 사도바울의 죽음 이후에 성립한 것이 확실하며, 연대적으로는 AD 70년 예루살렘성전의 파괴라는 대사건의 직전 아니면 직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색깔이 다른, 보다 신비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요한복음서」는 그보다 훨씬 후대, 2세기 중반경(AD 135~150 사이)에나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전기는 사도바울의 죽음 이후에 초대교회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로, 사도바울과 예수의 만남의 과정이 전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울이라는 세리였으며, 예수의 사후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어떤 황홀한 신비적 체험에 의하여 공중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사도바울 자신이 몇 군데서 기술하고 있는데, 이 기술들조차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질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와 바울의 만남은 한 인간과 한 인간의 역사적 만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와의 만남의 과정에 있어서 전혀 예수의 직전 제자들을 개입시키고 있질 않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라는 사람을 통해 예수 얘기를 들었다든가 하는 식의 기술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예수라는 사건과의 만남의 계기는 전혀 추상적인 것이며 바울의 주관적 의식내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스콜세지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에서도 바울과 인간화된 예수가 직접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가 바울에게 그대가 전파하는 예수는 거짓 예수라고 힐난하니까, 바울이 당신같이 인간화된 예수는 나에겐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내가 전하는 예수는 오직 사망을 이긴 부활한 예수일 뿐이며 사람들은 나로부터 그러한 말만 듣기를 원한다고 선포합니다.
셋째로, 사도바울의 편지의 대부분이 사도바울이라는 인간의 이름을 빌어 날조된 것이며(당대에는 이러한 식의 날조가 날조가 아니라 당연한 관행이었습니다), 그 중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 전ㆍ후서」가 그래도 오쎈틱(authentic)한 역사적 바울의 편지로 간주되는 것인데, 이러한 서한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 즉 바울의 예수는 역사적 인간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추상적 상징체이며, 우리 모든 개개의 인간이 그것의 지체일 뿐인 하나의 우주적 영성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롬12:4~5, 고전12:12~20), ‘나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는 갈2:20의 설법이라든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낡은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스러운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로움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니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와 같은 롬6:6~10의 바울설법을 잘 분석해보면, 예수의 수난(Passion)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회적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신비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부활도 단순히 미래에 닥쳐올 어떤 역사적 심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야 하는 영적인 이벤트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이며 상기의 맥락에서 말한다면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자’라는 뜻이며 깊은 맥락에서 비유하자면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하는 의미맥락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으로 살아있던 현실적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부활의 상징체로서의 예수(Christ in you)이며【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이것이다. 너 안에 있는 그리스도요, 그것은 영광의 소망이니라. To them God chose to make known how great among the Gentiles are the riches of the glory of this mystery, which is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골1:27.】 이러한 추상적 예수의 의미 체계는 당대의 모든 이방신비종교의 공통된 신화구조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라는 신비주의적 사상가가 예수라는 추상체를 통하여 일으킨 종교운동이 당대의 헬레니즘세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개명한 유대인 콤뮤니티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또 호응을 얻었다는 것이죠. 예수(Jesus)라는 이름도 원래의 희랍이름은 ‘Ἰησοῦς’인데 이것은 ‘888’이라는 신비적 숫자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체계일뿐이라는 것입니다【Ἰησοῦς(10+8+200+70+400+200=888). 희랍어의 각 자모에는 신비적 숫자가 할당되어 있다. 이 숫자를 합치면 888이 된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매우 평범한 히브리 이름인 죠슈아(Joshua)를 희랍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 신비적인 숫자의 느낌을 창출해내기 위해 억지로 꿰어 맞춘 이름이라는 것이다. The Jesus Mysteries, p.116.】.
이러한 바울의 신비주의를 우리는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인간이 영지(靈知, Gnosis)를 획득함으로써 그 자신이 기름부은 자,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됨으로서 죄의 삯에서 해방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영지를 「요한복음」의 저자는 로고스(Logos), 빛(Light) 등의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도바울을 오히려 초대교회운동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영지주의의 날카로운 비판자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미지가 영지주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왜곡되어간 모습을 반영하는 날조과정의 파편들로부터 오는 인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야말로 영지주의자였으며, 영지주의의 원조였으며, 이 영지주의야말로 초기 기독교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지주의운동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이제는 거꾸로 추상적인 예수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처럼 전기문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 승가운동이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니까 붓다 전생의 보살의 본생담(자타카, Jātaka)들이 지어지게 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합니다. 불교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본생담의 이야기를 싯달타 전생의 다양한 전기문학장르로 파악하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이야기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생담의 주제는 매우 단순합니다. 자기헌신이며 희생이며, 자비며, 사랑입니다. 즉 역사적 싯달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친 자비행을 통하여 해탈(解脫, mokṣa)을 이룩할 수 있었나 하는 대승정신의 드라마틱 프리젠테이션인 것입니다. 즉 자타카는 사실적 스토리로서의 역사성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승 6바라밀의 제1명제인 보시의 멧세지를 구현하기 위한 문학적 선포로서 그 일차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의 전기도 자타카와도 같은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서 초대교회에 유행했던 하나의 현상이었으며, 이 현상의 단초를 형성한 것의 전형을 「마가복음서」라든가, 「Q자료」라든가【「마가복음서」의 자료를 「마태」와 「누가」의 기자가 공통으로 참고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마가복음서」에 없는 것으로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제3의 자료가 약 200줄(verses) 정도 되는데 이것을 신학계에서는 ‘쿠벨레’(Quelle, 자료)라는 독일어의 첫머리를 따서 ‘Q자료’(Q material)라고 부른다.】, 하는 것들을 들 수 있지만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서 이외로도 수백개의 다른, 매우 다양한 주제와 고유명사들이 등장하는 복음서(전기문학)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수백개의 일부를 우리가 지금 체노보스키온 문서(나하그 함마하디 라이브러리)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백개의 복음서 중에서 오늘의 4복음서 체제가 성경으로서 고착된 것은 AD 4세기경에나 내려와서 이루어진 사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주도한 사람들은 지독하게 영지주의를 혐오하고 박해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373)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의 요체는 초기 기독교의 원래 모습은 영지주의라는 영적인 운동(spiritual movement)으로 출발한 것이며,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모든 것은 오히려 그러한 영적 운동을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후대의 문학적 구성이었다 하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해도 그러한 영적 운동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그 영적운동의 배경으로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예수의 생애를 구현한 어떤 역사적 인물이 나사렛과 예루살렘에서 활약했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마저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시바는 인도의 가장 인기 높은 신이다. 그런데 시바신은 인간의 형상으로 숭배되지 않는다. 그를 나타내는 것은 그의 성기이다. 모든 시바의 사원의 핵심부, 지성소에는 거대한 남성의 성기가 모셔져 있다. 인도는 이 지상에서 가장 노골적인 남근숭배(phallic cult)의 문명이다. 이 발기한 남근 링감(Lingam)은 반드시 여성의 성기, 요니(Yoni) 속에 박혀 있다. 요니는 시바의 모든 여성배우자(Shakti)의 성기를 상징한다. 성교 그 자체를 우주의 생성의 근원으로 간주한 것이다. 링감과 요니는 음과 양이 분리될 수 없다는 세계관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 링감ㆍ요니의 숭배는 아리안 이전의 드라비다 토속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하랏파유적에 링감의 조형이 발견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거대한 남근앞에 싱싱한 꽃, 청정한 물, 풀잎의 새싹을 바치면서 경배한다. 엘로라 카일라사 사원(Ellora Kailasa Temple)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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