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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다 이루었다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다 이루었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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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나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수자타호텔 209호실로 들어갔다. 수자타호텔 리셉셔니스트가 내가 딴 호텔에서 자는 것을 눈치채고, 남향의 좋은 수트룸을 주었던 것이다. 안온한 느낌이 드는 쾌적한 방이었다. 나는 이날 밤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있기로 했다. 나는 두 손을 쫙 벌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형상으로 침대 위에 벌컥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我也悉達!

 

나 또한 다 이루었다!(19:30)는 뜻이다실달(悉達)’에는 싯달타라는 뜻과 다 이루었다는 뜻이 겹쳐있다.. 순간 나의 기나긴 반백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무 이유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토록 치열하게 나는 살아야 하는 것일까? 머나먼 옛날, 엄마와 남산 수도산에 원족가던 일, 눈들 방죽에서 아이들과 빨개벗고 툼벙치던 일, 서울역에서 내려서 시발택시들이 가득 찬 광장에서 남대문의 장관을 휘둥그레 쳐다보던 일, 대학시험에 낙방하여 찔찔 눈물을 흘리던 일, 첫 아기 승중이의 탄생을 타이뻬이에서 국제전화로 듣고 기뻐하던 일, 동경대학에서 내가 출국한다고 일곱 분의 교수님들이 나 한사람을 위해 아카몬(赤門) 앞 회식집에서 센베쯔카이(餞別會)를 열어주셨던 일, 귀국할 때 노석학 벤자민 슈왈찌 선생님께서 훈계하시던 모습, 안암캠퍼스 학생들과 최루탄 맞으면서 같이 데모했던 일, 고려대학교의 마지막 수업, 서관 314강의 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던 일, 이 모든 영상들이 순간에 똑똑 침상 위로 떨어지는 눈물들과 함께 스르르르 지나갔다. EBS의 노자강의, KBS의 논어이야기의 감격, 성균관대학에서의 마지막 논어강의, 출국, 맨하탄의 3개월, 인도기행!

 

우리 엄마는 원래 개화에 뜻이 있는 여성이었다. 옛날에 우리 외할아버지보고 양코배기 선교사님께서 우리 엄마를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중매결혼 때문에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말았지만 외할아버지가 자기를 선교사한테 안 넘겨준 것을 매우 회한스럽게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아마 그때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도미(渡美)했더라면 김활란박사처럼 됐을 꺼라고 했다. 우리 엄마는 김활란박사를 매우 부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께서는 인척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휘문고보 학생에게 딸을 일찍 시집보냈던 것이다. 지독하게 보수적인 사대부가문이었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소실이 열둘이나 있었다. 우리 엄마는 열두 소실이 있는 곳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러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개화의 뜻은 꺾였지만 내 자식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우리라! 그들로 하여금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게 하리라! 우리 엄마는 정말 정성스럽게 자식들을 회초리로 키웠다. 아들 넷을 낳았고 딸 둘을 낳았다. 그 막내가 도올 김용옥이다. 마흔이 넘어 낳은 나는 엄청난 난산이었다고 했다. 기계로 뽑아냈는데 그때 기계에 눌린 눈이 지금도 침침하게 안 보인다. 그리고 거의 사체에 가까운 지경이라 차거운 윗목에 내버려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꼼지락거리더니 살아났다고 했다. 나는 갓난 아기시절부터 죽었다가 부활했던 것이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크면 젊은이들을 바르게 교육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항상 나의 생애의 의문이었다.

 

그 어머니가 구순을 넘으셔서 아직도 살아 계시다. 과연 내가 우리 엄마가 기대했던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말 한번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우리사회에서 무지하게 욕을 얻어먹는다. 대한민국의 지식인으로서 나만큼 욕을 얻어먹는 놈이 없다. 지식인이 얻어먹어야 할 욕은 내가 다 얻어먹는 느낌이다. 내가 그렇게도 나쁜 놈일까? 내가 한번 이 사회에 나가 입을 뻥끗했다 하면 다 날 죽이려고 한다. 칭찬하고 싶은 사람은 입을 다물 뿐이고, 입을 여는 사람은 모두 나를 증오한다. 정말 증오한다. KBS논어강의도 그렇게 좋은 강의였는데 왜 그렇게 모든 신문이 아무 이유없이 날 죽이려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왜 정신이 바르게 든 총명한 이 땅의 젊은이들, 엘리트 기자님들이 날 그토록 죽이려고 씹어대야만 했는지 도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인생의 역정은 대강 이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럼 나는 도움을 준다. 그런데 도움을 받고 나면 그들은 그 도움에 대한 나의 공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무지하게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보고 좀 빠지라고 그런다. 그럼 난 좀 배신감을 느끼지만 빠져버린다. 그런데 또 빠지고 나면 또 빠졌다고 욕한다. 그래서 난 이래서 욕먹고 저래서 욕먹는다. 이렇게 산 것이 이제 나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달라이라마의 대화 속에서는 나는 이러한 나의 불미스러운 인생의 추억의 한 찌꺼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도 순결한 감정의 오감이었다. 내가 그와 주고받은 것은 지식의 체계가 아니었다. 순결한 영혼이 오간 것이다.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날 밤, 그 느낌대로 나는 살포시 잠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예정된 시간에 다시 대화의 자리에 착석했다. 다짜고짜 우리는 다시 대화로 몰입하고 있었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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