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불상 도입의 명과 암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불상 도입의 명과 암

건방진방랑자 2022. 3. 20. 15:50
728x90
반응형

불상 도입의 명과 암

 

 

달라이라마는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팔목에 찬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나 도올은 평생 팔목에 시계를 차지 않고 살았는데 달라이라마는 왼쪽 손목에 쇠줄의 네모난 시계를 차고 있었다. 자주빛 다체(drache) 법복을 걸친 그의 우람찬 몸매에 달랑 감겨있는 시계줄의 모습은 정말 코믹했다. 그러나 그는 문명의 이기도 마다하지 않는 성자였다. 얼마나 바쁜 일정을 보내시면 저렇게 손목에 시계를 걸치고 사실까?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나와의 대화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불상에 관한 이러한 장황한 얘기를 하는 본 뜻은 우리 북전불교(福田佛敎)에서는 대승만이 불타의 참 가르침을 전하는 진짜 불교이고, 소승은 개인의 수양에 치우친 좀 수준 낮은 불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이 불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소승의 비아이콘적인 태도야말로 불교의 본래정신의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불상을 도입하면서부터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ㆍ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불교의 진면목은 무신론이었는데, 불상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유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불상숭배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대한 일반재가신도들의 불교이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고자 하는 유일신관과 별 차이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선승 단하(丹霞) 천연(天然, 739~824)은 법당에서 좌선하다가 궁둥이가 시려우니까 목불상을 도끼로 뽀개서 궁둥이 쬐는 불을 지폈지만이 장면은 나의 책, 화두(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서울 : 통나무, 1998), pp.68~69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선()의 최고경지를 모은 백 개의 공안집, 벽암록(碧巖錄)중에서 6개 공안을 강의한 것이다. 선사들의 치열한 모습들이 장엄한 드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다., 일반신도들의 불상에 대한 집착은 현실적으로 불타를 중심으로 한 일신교 사상이라 말해도 하등의 변명이 있을 수 없는 수준으로 불타를 유신론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까지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의 부정적 측면이 인도민중에게 새로운 신앙운동을 촉발시켰고 이 신앙운동은 결국 시바나 비슈누신을 숭배하는 탄트리즘(tantrism)으로까지 발전하였고 이러한 탄트리즘이 불교로 역수입되어 밀교, 금강승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티벹불교를 생각할 때, 너무 밀교 중심이래서 제식이 번거롭고 마치 다신론적인 신앙체계인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때 달라이라마는 단호한 어조로 나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탄트리즘(밀교)은 불교탄트리즘(Buddhist Tantrism)도 있지만 비불교탄트리즘(Non-Buddhist Tantrism)도 있습니다. 비불교탄트리즘의 대표적인 것이 힌두교의 다양한 탄트리즘 형태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교탄트리즘과 비불교탄트리즘을 구분짓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한 반야공과 자비입니다. 반야공과 자비에 뿌리를 두지 않는 밀교는 밀교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탄트리즘은 공을 전제로 하고 자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대승의 일부며 대승의 발전일 뿐입니다. 따라서 티벹의 밀교도 대승정신의 계승일 뿐입니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과 공을 들여 오색찬란하게 만든 만다라(曼茶羅, 曼陀羅, maṇḍala)도 완성되면 곧 후욱 바람에 날려버리고 말지요. 그것을 아까워 하는 것은 우리 티벹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장엄한 만다라의 신(불ㆍ보살)의 세계라 할지라도 결국 공이라는 것이죠. 이 공의 깨달음을 무한한 자비로 확대시키는 것, 이것만이 티벹불교의 정수입니다.”

 

이미 우리의 작별시간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주변의 라크도르와 타클라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달라이라마를 재촉했다. 달라이라마는 라크도르 스님에게 항상 카조다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카조다가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라크도르 스님의 애명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이 막히거나 무슨 지시를 할 때마다 달라이라마는 카조다를 연발했다. ‘카조다라는 말은 매우 현묘한 여운을 내 귀에 남기곤 했다. 그는 카조다에게 시간을 짜보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나중에 티벹사람들에게 녹음테이프를 들려주고 확인해본 결과 내 귀에 들린 카조다라는 말은 카리싸(qa re sa, 뭐라고?), 카리세고레(ga re ser go ray, 뭐라고 할까?)라는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영어로 말문이 막히실 때마다 라크도르 스님께 그걸 뭐라고 말해야 좋지?”하고 물어보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원래 우리의 만남은 오늘 하루만의 길지 않은 시간으로 약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도 지체되었다. 그렇지만 달라이라마는 나와 대화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실은 오늘 중요한 예식이 대탑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가봐야 합니다. 그런데 도올선생님은 아직도 할 얘기가 많으시죠? 우리 내일 다시 만납시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