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본질적 주제는 죽음
나는 갑자기 숨이 콱 막히고 말았다. 사실 난 중국철학적 세계관에 오며는 너무도 할 말이 많다. 그것은 나의 언어영역이기 때문에 나는 세세하고도 권위있는 답변을 끝없이 늘어놓을 수가 있다. 그러나 성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었다. 전혀 다른 평행선의 신념체계를 맞부닥뜨려 본들 거기서 설득이나 타협이란 실제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교적 가치의 문제가 개입되고 있는 이상! 달라이라마는 말씀을 이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 윤리(secular ethics)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삶(good life)에 관한 것이며, 좋은 사회, 좋은 군주, 좋은 시민에 관한 담론일 뿐입니다.”
“성하께서는 이미 불교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불교와 유교를 하나는 종교이고 하나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양분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불교도 종교가 아니라고 한 나의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내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뜻은, 종교가 서양에서처럼 창조주나 이 우주의 모든 운행을 관할하는 지배자로서의 초월신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면, 그러한 맥락에서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뿐입니다. 즉 종교의 성립요건에 창조주나 초월신의 개념이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 가장 본질적인 주제는 ‘신’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즉 인간의 유한성의 문제이지요. 그러니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반드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Afterlife)에 대한 상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의 생철학이나 실존철학도 삶의 철학이지만 죽음의 문제로부터 발전한 사상체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중국사람들이 아무리 이러한 내세의 문제를 등한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등한 사유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진 담론일 뿐, 민중의 실제적 관심은 내세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 진시황제가 자기 무덤 속에 그렇게도 거대한 지하궁전을 만들었으며, 왜 모든 귀족들의 무덤이 그렇게도 내세적인 심볼로 가득 차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불교는 이러한 내세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문명에도 깊게 침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영혼불멸에 대한 갈망, 이것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불교는 이러한 문제를 매우 근원적으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만 하더라도 윤회의 비관론(the pessimism of saṃsāra)을 반야의 낙관론(the optimism of prajñā)으로 전환시킨 일대 정신혁명(spiritual revolution)이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그의 웅변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는 모든 주제에 대해 매우 명료한 답변을 다 준비해놓고 있는 것 같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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