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아해들과 주인들
옷을 벗어라! 과연 이것은 무슨 뜻일까?
❝막달라 마리아의 질문은 예수도반됨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다양한 전승이 복합되어 있다. 옷을 벗어라, 그리고 이 세상을 경계하라, 익은 곡식을 추수하라, 이러한 메시지들은 평면적 논리로써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제21장
1마리아가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당신의 따르는 자들이 어떠 하오니이까?” 2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에서 사는 아해들과 같도다. 3그 밭의 주인들이 올 때에, 그 주인들은 ‘우리의 밭을 우리에게 돌려다오’라고 말할 것이다. 4아해들은 주인들 앞에서 그들의 옷을, 주인들에게 밭을 돌려주기 위하여, 벗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해들은 그들의 밭을 주인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5이러한 연유로 내가 이르노니, 한 집의 주인이 한 도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주인은 그 도적이 도착하기 이전에 방비태세에 있을 것이요, 그 도적이 그의 소유인 집을 뚫고 들어와 그의 물건을 훔쳐 내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6그렇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하여 방비태세에 있으라. 7너희 자신들을 강건한 힘으로 무장하여, 도둑들이 너희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8왜냐하면 너희가 기대하는 환난이 결국 닥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라. 9너희들 가운데 내 말을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노라. 10곡식이 익었을 때가 되면, 곧 그 사람이 손에 낫을 들고 와서 그것을 추수하였나니라. 11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1Mary said to Jesus, “What are your followers like?” 2He said, “They are like children living in a field that is not theirs. 3When the owners of the field come, they will say, ‘Give our field back to us.’ 4They take off their clothes in front of them in order to give it back to them, and they return their field to them. 5For this reason I say, if the owner of a house knows that a thief is coming, he will be on guard before the thief arrives and will not let the thief break into the house of his estate and steal his goods. 6As for you, then, be on guard against the world. 7Arm yourselves with great strength lest the robbers find a way to get to you, 8for the trouble you expect will surely come. 9Let there be among you a person who understands. 10When the crop ripened, the person came quickly with sickle in hand and harvested it. 11Whoever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이 장의 해석은 세부적으로 검토해보면 풀리지 않는 구석이 많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Ⅰ)1~4절, (Ⅱ)5~9절, (Ⅲ)10절, (Ⅳ)11절은 각기 독립된 파편인데,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하여 합성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Ⅰ에서는 주어가 모두 복수로 되어 있는데(아해들, 주인들), II에서는 주어가 단수로 되어 있는 것도(주인, 도적), 그 나름대로 합당한 해석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텍스트의 전승이 다른 데서 오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해석에 있어서도 II의 내용을 예수 메시지의 주간(主幹)으로 간주하는 데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하고 있지만, Ⅰ의 내용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볼 것인가, 부정적인 맥락에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 안티옥에서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 사도 바울이 이용한 바닷가 항구 실루기아(Seleucia)에는 그 도시를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판 거대한 터널이 있다. 베스파시아누스황제 때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킨 장본인인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기 때문에 티투스-베스파시아누스 터널(Titus and Vespasian Tunnel)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가보면 위로부터 바위산을 깎아 내려간 공사인데 장쾌한 모습이 1,380m나 뻗쳐 있다. 물길을 돌리기 위하여 이토록 거대한 공사가 행하여졌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항구 뒷산의 이름이 모세산(Mose's Mountain)이다.
첫머리에 나오는 ‘마리아’는 콥트어로 ‘마리함(Mariham)’인데, 마리함은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후대에 터무니없는 추론에 의하여 창녀와 같은, 죄가 많은 여인으로 인상 지워졌지만, 그녀는 초대교회의 일반적 관념 속에서 예수운동의 핵심세력이었으며, 예수와 거의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던 이너 서클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예수의 반려(Jesus's companion)였으며 예수가 계시하는 오의(奧義)를 전수받는 특수한 존재였다(「빌립보복음서』 59), 이 장에서도 예수와 마리아의 유대감은 시종 전제되어 있다. 마리아의 질문은, 예수의 도반됨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것이다. 예수와 마리아의 유대감 속에서 따르는 자들(도반들)은 객화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다.
Ⅰ의 내용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면 ‘아해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는, 즉 비본래적 자아 속에서 살고 있는 거짓 도반들이다. ‘아해들(children)’이란 번역은 콥트어 ‘세레 셈(šēre sēm)’에서 왔는데, 이 말은 희랍어의 ‘파이스(pais)’에 해당된다. 파이스는 아이, 아들, 또는 종, 노예, 하인(눅 7:7, 15:26, 마 14:2)의 뜻이다.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을 위탁받은 종들과도 같도다’의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들이 입고있는 옷조차도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인들이 오면 옷과 밭을 다 빼앗기고 만다.
▲ 예루살렘 옛 성문 중의 하나인 스테판 문, 스테판은 이 근처에서 돌에 쳐죽임을 당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스테판은 박해자 사울의 발 아래서 죽어갔다. 같은 배경을 지닌 지식인이었던 사울의 양심은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울이 바울로 회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스테판의 순교가 오늘의 보편기독교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Ⅰ의 내용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옷을 벗는다’는 표현은 도마복음 37장에도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부끄럼없이 옷을 벗을 때만이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해탈’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육신의 집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는다’(고후 5:4)는 메타포와는 대비되는 ‘발가벗음’이다(Th.37). 그렇다면 ‘그들의 것이 아닌 밭’은 ‘육신의 집’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육신의 주인이 왔을 때, 그들에게 옷을 벗어던진다는 의미는 ‘해탈’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적 자아의 회복이라 말할 수 있다. ‘밭의 주인들’이야말로 이 세상 혹은 육신의 지배자들로서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5~9절의 내용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진실한 도반들)의 세상과의 대적적 관계가 암시되고 있다. 예수의 제자됨은 필연적으로 세속적 가치로부터의 소외를 동반한다. 코스모스는 방비되어야 할 위협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예수운동이 실제로도 험난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동시에 세속적 가치로 함몰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자기수양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도마의 5~9절 내용은 마 24:43과 눅 12:39에도 나타나고 있다(Q55). 그러나 도마자료와 비교해보면 큐자료는 이미 내면적 수양에 관한 도마의 맥락을 철저히 인자담론의 종말론적 협박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눅 12:40). 도마에는 그런 종말론적 맥락이 배제되고 있다.
10절은 또다시 마가복음 4:29에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도마나 도마와 유사한 텍스트를 놓고 마가의 편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마에는 앞에 있는 겨자씨 비유가 마가에서는 뒤로 붙어있다. 그 내용도 마가에는 하늘나라의 성숙과 임재에 관한 종말론적 맥락이 암시되어 있으나 도마에는 그런 암시가 없다.
10절의 과거형도 좀 어색하나 강조형일 수도 있다. 이해하는 한 사람은 반드시 곡식이 익었을 때를 아는 사람이요, 또 추수를 행하는 사람이다. 이해는 반드시 실천과 연결된다. 이해자는 예수운동써클의 핵심을 형성하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낫을 들고 와서 추수한다’는 이미지는 마가에서는 종말의 도래를 암시하고 있는데 반하여, 도마에서는 진정한 제자그룹으로 편입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내면이 성숙한 인간들의 유대감 속에서 예수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표현한 말일 것이다. 11절은 정구(定句)이지만, 제자됨의 비의성(秘儀性)이 암시되고 있다.
▲ 국민의 사랑을 받던 한 빛줄기의 선종(善終, 2009, 2, 16, 18:12). 그의 삶은 하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는 과정 그 자체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세례명인 스테파노는 사도행전 6~7장에 나오는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의 이름에서 왔다. 스테판은 초기 예루살렘교회에 있어서 헬라화된 개명한 그룹을 대변한다. 죽음을 앞둔 그의 연설은 당시의 초기 헬라 기독교(early Hellenistic Christianity)의 메니페스토라 할 수 있다. 스테판은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행 7:44~53).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모든 성전은 애초로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신약 어느 곳에도 없는 래디칼한 주장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2001년 KBS 1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출연하셔서 당신의 해박한 유교경전 지식을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모든 종교의 화합과 상통을 피력하시고 교회 밖에서도 인간의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명료하게 말씀하시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여! 김수환 추기경님의 너그러움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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