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천 명과 한 명
천 명 중 하나뿐인 자여! 단독자로 서라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선택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상은 비의적 종교의 필수조건이다. 선종(禪宗)의 각(覺)이나 유교의 인(仁)은 그런 비의성을 타파한다. 도마의 하나된 자도 그런 비의성 속에 갇혀있는 단독자로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제2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택하리라. 전 명 가문제의 하나를, 만명 가운데서 둘을. 2그리고 그들은 하나된 자로서 서 있게 되리라.”
1Jesus said, “I shall choose you, one out of a thousand, and two out of ten thousand, 2and they will stand as a single one.”
도마복음서에서 나타나는 각자(覺者)들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실존이다. 깨달음이란 내면적 사태이기 때문에 집단적일 수 없다. 도마복음 속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해석의 대상이며 발견의 대상이며 추구의 대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고독한 주체(the solitary subjectivity of an individual)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선택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상은 모든 종교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정서이다. 지극한 경지를 말하면 필연적으로 비의성(秘儀性)을 배제할 수 없고, 비의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의(奧義)를 깨닫는 자가 소수라는 전제가 있다. 마태복음 22:14를 보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플라톤의 『파에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실상, 용기와 자기절제와 정직함, 그러니까 진실한 도덕성을 확립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이다. 쾌락이나 공포와 같은, 그따위 느낌이 있고 없고는 도덕과는 별 상관이 없다. 상대적인 감정적 가치에 기초한 도덕성의 체계라는 것은 단순히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자체로서 진실성이나 건전성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철저히 세속적인 관념일 뿐이다. 진실한 도덕적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절제이든 정직이든 용기이든, 결국은 모든 세속적 감정으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혜라는 것 자체가 결국은 정화(purification)인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적 수행을 하는 자들은 이러한 경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의 이론의 배후에 깔린 은유적 의미는, 수행하지 아니하고 깨닫지 못한 채 다음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통의 수렁에서 헤매게 된다는 것이며, 정화되고 해탈된 상태로 다음 세상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산다는 것이다. 종교적 이니시에이션을 실천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바카스의 지팡이를 휘두르는 자는 많으나 진정으로 바카스신에게 헌신하는 자는 적다.” 내 생각에는 신에게 헌신하는 자들이란 결국 정도(正道) 속에서 철학적 삶을 실천해온 자들이다. 나는 내 인생을 통하여 이들과 같이 하려고 나의 최선을 다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하지 않은 일이 없다. 이러한 나의 포부가 정당했는지, 내가 과연 무엇인가를 성취했는지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저 제상에 도달했을 때 신의 도움으로 매우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Phaedo, 69b-d).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이러한 플라톤의 기술 속에서 우리는 헬레니즘시대의 종교적 성향의 일반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감정과 도덕의 대립, 정화와 해탈, 철학적 삶과 저승의 관계, 이 모든 주제들이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바카스의 지팡이(나르테코스)를 휘두르는 자는 많으나 진정으로 바카스신에게 헌신하는 자는 소수이다” 라는 말은, 곧 본 장의 주제를 말해주는 동시에 도마복음서의 예수운동가들의 삶의 목표나 양태에 관해 많은 구체적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언어에도 나타나는데 다자와 소수의 대비를 강조하는데 쓰이는 일종의 정형구일 것이다. 신명기 32:30에 ‘어떻게 혼자서 천 명을 몰아내고, 둘이서 만 명을 쫓아낼 수 있었으랴’라는 표현이 있고, 전도서 7:28~29에는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 초기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고행승들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여러 방식의 고행이 있는데, 뾰족한 꼭대기 위에서 고행하는 특이한 방식이 있다. 세속을 멀리하고 무한자에게로 가까이 간다는 뜻이 있다. 이들을 스타일라이트(stylite)라고 하는데 희랍어 스틸로스(stylos, 기둥)에서 왔다. 우리말로 주행승(柱行僧)이라고 번역한다. 안티옥에서 18km 떨어진, 사만다그(Samandaǧ)로 가는 도중,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는 이 교회는 그 정가운데에 주행승이 앉았던 높은 기둥의 그루터기가 남아있다. 이 주행승의 이름은 어린 성 시므온(St. Simeon the Younger, 521~592)인데 안티옥 태생이다. 5살 때 대지진(526년)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7살 때부터 놀라운 고행과 이적과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산 속에서 541년부터 고행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전파되어 많은 추앙자들이 몰리자 551년 그를 위한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는 돌기둥 꼭대기에서 설교를 하였고 592년 죽을 때까지 41년 동안 그 꼭대기에 머물렀다. 종교사적으로 이슬람 모스크의 첨탑 미나렛(minaret)은 이 주행승의 전통이 변형된 것이다. 마호메트가 시리아로 왔을 때 주행승들을 만나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도 초기기독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785년에 영국박물관에 의하여 구매된 아스큐 코우덱스(The Askew Codex) 콥틱문헌인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 속에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여! 누가 과연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겠나이까? 모든 죄악으로부터 완벽하게 순결할 수 있겠나이까? 한 가지에 순결해도 다른 것에 순결치 못할 수 있지 않겠사옵나이까?”
구세주께서 대답하여 마리아에게 가로되,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제1의 신비의 신비를 달성한 자로서,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Ch.134),
『피스티스 소피아』는 여성명사로 의인화된 ‘피스티스 소피아(믿음의 지혜)’의 타락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회개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경전이다.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초기기독교 사상가 발렌티누스(Valentinus) 학파계열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매우 체계적인 우주론이 전제되어 있고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쇠인 그노시스가 설파되며, 예수 이전에는 빛으로 진입한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선포된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이러한 문헌에 관해서도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본 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은 하나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라는 제2절의 표현인데, 발란타시스(Richard Valantasis)와 같은 주석가는 선택받은 소수들이 하나의 동일한 집단적 아이덴티티(unity to the corporate subjectivity)를 갖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그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그들 - 하나’의 관계를 복수적 집단의 단수화로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공통의 지향점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역시 ‘하나된 자’는 모든 대립이 초월된 무분별심의 원융한 존재(4·22·106장)이며, 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는 고독한 실존(16·49ㆍ75장)으로서 ‘그들’ 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독립개념적 술어로서 풀어야 마땅하다. 도마복음은 역시 집단보다는 개체의 내면에 강조점이 있다. 그리고 ‘서다(to stand)’는 16·18·28장에서도 예시(例示)되고 있듯이 어떤 ‘신적인 당당함’을 나타내는 ‘섬’이다. 세속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실존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 이 어린 성 시므온 교회는 세 개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기적의 언덕(Hill or Wonders)’이라고 불렀는데 주행승의 기둥꼭대기를 쳐다보기만 해도 치유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건축양식도 독특한데 주두(柱頭)가 당시 보편적이었던 코린트 양식이 아니고 대바구니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시므온이 죽은 후에도 이곳에는 계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636년 이슬람정복으로 쇠퇴하여 13세기에 폐허가 되었다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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