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아기와 천국
네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될 때 너는 나라에 들리라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웅동체의 제3의 성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식남녀(飮食男女)의 대욕(大欲)이 극복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다.❞
제22장
1예수께서 몇 아기들이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시었다. 2예수께서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을 빨고 있는 아기들이야말로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과 같나니라.” 3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그리하면 우리는 아기로서만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삽나이까?”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5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 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6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7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1Jesus saw some babies being suckled. 2He said to his followers, “These babies being suckled are like those who enter the kingdom.” 3They said to him, “Shall we then, as babies, enter the kingdom?” 4Jesus said to them, “When you make the two into one, and when you make the inner like the outer and the outer like the inner, and the upper like the lower, 5and when you make male and female into a single one, so that the male will not be male nor the female be female, 6and when you make eyes in place of an eye, a hand in place of a hand, a foot in place of a foot, and an image in place of an image, 7then you will enter the kingdom.”
천국과 아기들의 관계를 논한 구절은 공관복음서에도 있다. 마가복음 10:13~16을 보라.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마가의 기사는 마태 19:13~15, 누가 18:15~17에도 나오고 있다. 누가는 마가를 보다 충실히 베꼈고, 마태는 간결하게 축약하였다. 마가자료 중 15절은 원자료에 없는 것을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에는 마지막 안수와 축복의 기술이 없다. 그리고 이 기사의 병행구가 마가 9:36~37(마 18:2~5, 눅 9:47~48)에 나오고 있다.
이 기사들이 안수와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제식화된 그리스도론의 윤색이 전제되어 있다.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지 못하게 하는 것은 초대교회라는 커뮤니티에 누구든지 초대될 수 있다고 하는 개방성을 선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기술에 전제되어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천진무구한 순진한 마음이다. 그러나 도마의 ‘아기들’은 그러한 도덕적 순결의 대명사라기보다는 원초적 합일의 상징이다. 물론 예수의 그리스도적 권위도 배제되어 있다. 분별되기 이전의 무분별한 혼융(混融)의 상태로의 복귀를 곧 ‘아기와 같음’이라 말한다. 그리고 ‘아기와 같음’이 곧 ‘천국에 들어감’이다.
제3절의 질문은 요한복음 3:4에 나오는 니고데모(Nicodemus)의 질문, 거듭나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 엄마자궁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되냐고 묻는 그러한 순진한 질문을 연상시킨다. 추상적 함의를 어리석은 듯,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그 추상적 함의의 본면(本面)을 더욱 강조시키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작가들의 문학적 기법이다.
‘젖을 빤다’는 것도 단순히 어린아기의 생존상태의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획득하는 변화(transformation)의 과정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몸의 재건(reconstruction)이며 궁극적으로 해탈(解脫)의 과정이다.
이 ‘새로운 몸’은 모든 둘을 하나로 만드는 몸이어야 한다. 양은 양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으며, 음은 음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다. 도(道)의 경지에서는, 음과 양은 끊임없이 분화와 융합의 과정을 거친다. 음이 곧 양이며, 양이 곧 음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일체(一體) 속에 혼재(混在)한다. 일음(一陰), 일양(一陽)하는 순환의 과정이 곧 도일 뿐이다[一陰一陽之謂道], 왕필(王弼, 226~249)에 의하면 도(道)란 무(無)의 다른 이름이다. 무불통(無不通), 무불유(無不由)의 무차별 경지인 것이다. 주렴계(周廉溪, 1017~1073)가 음과 양을 말하기 이전에 태극(太極)을 말하고, 무극(無極)을 말하는 것도 음과 양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무(無)를 가치의 지향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 안티옥의 외항으로서 바울이 최초의 전도여행을 떠난 곳인 실루기아 항구(Seleucia Pieria)의 뒷산, 모세산 중턱에 있는 무덤군. 이렇게 바위를 깎아 붙박이 식 석관을 촘촘히 만들어 놓은 집단 무덤을 베시클리(Besikli)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요람석굴(Cradle Cave)이라고 한다. 이 베시클리 안에 93기의 시신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밑으로 석관의 구덩이들이 보인다. 실루기아 항구도시는 원래 BC 305년에 셀레우코스왕조의 수도로서 개발된 도시였다. 이 무덤군은 AD 1세기부터 개발되어 7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526년과 528년, 두차례의 지진에 무너지기도 하였다. 근세에 발견되었을 때는 완벽하게 도굴된 후였다.
도마도 ‘속과 겉이 하나되고, 위와 아래가 하나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됨’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라는 표현에 있어서 ‘하나된 자(a single one)’는 자웅동체의 신화적 아담을 말한다기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주체(subjectivity)의 탄생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남자가 남자로서만 대상화되고, 여자가 여자로서만 대상화될 때,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욕망이 분출하게 마련이다. ‘하나된 자’라는 표현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새로운 성(a new gender), 새로운 몸, 새로운 인격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으로 제3의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남·여의 욕정이 극복되는 금욕과 고행의 수련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음식남녀(飮食男女)에 사람의 대욕(大欲)이 존(存)한다는 『예기』 「예운」편의 명언을 상기시킨다.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라는 표현은 ‘눈 대신에 눈을 만들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눈 대신에 눈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금욕적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눈이 사라지고 새로운 눈이 생겨나는 신체의 혁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새로운 눈, 새로운 손, 새로운 발을 거쳐, 최후에는 ‘새로운 모습’에 이르게 된다. 즉 나의 내면적 세계가 혁명된 새로운 자아상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가로 우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본 장의 내용은 제4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제6절의 모습은 83ㆍ84에도 나온다. 남·여의 하나됨에 관하여 갈라디아서 3:28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맥락은 다르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ㆍ여의 차들이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 남·여의 원초적 융합을 말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하나된 자’는 도자가 말하는 ‘무명(無名)’이나 ‘박(樸)’을 연상하는 것이 가장 그 원의에 접근할 것이다.
▲ 현재 터키에 속해있는 이 실루기아 항구를 한 여인이 당나귀를 몰고 지나가고 있다. 당나귀는 먹는 것에 비해 힘이 좋아 지역 민중들의 사랑을 받는 동물이다. 바울도 이러한 모습으로 이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뒤의 산이 모세산, 길가의 석축이 동서문명을 융합시켜 찬란한 헬레니즘문명을 만든 셀레우코스왕조 최초의 수도성곽의 유일한 잔해이다. 문명의 영고성쇠를 실감케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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