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수 있어 좋다
3월 14일에 임고반에 됐다는 문자가 왔고 15일에 마침내 7년 만에 다시 이곳에 들어왔다. 그렇게 새 집, 새 공부공간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고 오늘 갑자기 날짜를 보니, 벌써 한 달이 후다닥 지나 있는 게 아닌가. 꿈만 같아서 그랬던지, 늘 그리던 그 시간이 마침내 현실이 되어 그랬던지 더욱 빨리 지나간 느낌이다.
▲ 임고반 오리엔테이션, 오랜만에 가슴 뛰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미화, 그걸 느끼다
막상 머릿속으로 그릴 때의 포근히 안겨오고 마냥 좋았던 것 같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도, 현실이 되면 퇴색되거나 나의 만용인지도 모를 것에 기가 질리게 마련이다. 기억 속의, 추억 속의 그때는 들끓던 온갖 감정, 앞날이 기가 막히게 아무 것도 없어 보였던 불안, 격정, 낙담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고 순백의, 또는 뽀샤시 처리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부산행’에서 공유가 딸이 태어나던 당시를 플래시백으로 회상하는 씬 같거나 ‘리얼’에서 김수현이 약물에 중독되어 배경은 모두 사라진 채 얼굴만 몽롱한 상태로 표현되던 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막상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앉아 있으니 좀이 쑤시고, 임용을 관둔 이후 한문문장을 진득하게 본 일이 없으니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로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현실의 중압감, 미래의 불투명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가 않다.
▲ [부산행]의 장면. 심각한 장면에서 플래시백으로 딸이 태어날 때를 뽀샤시한 장면으로 담아내서 놀랐다.
한 달 동안 나를 믿고 오다
그래서 살풋 놀라긴 했고 며칠 간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당연히 거쳐야 할 과도기였던 거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몸도 척척 적응을 하면 가장 좋겠지만 ‘습관이란 무섭죠. 생각처럼 안 되요♬’라는 노랫말처럼 몸은 언제나 생각보다 느리다.
하지만 몸이 나이고 생각은 남인 탓에 몸의 상태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마음만 앞섰다간 꼬꾸라지기 십상이고 모처럼 돌아온 이 자리를 저주의 순간으로 만들기 쉬우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쉬엄쉬엄, 아주 심간 편하듯이, 그저 시간 때우듯 하는 자세로 이 분위기에 서서히 무젖도록, 내 자리에 친근해지도록, 공부하는 것에 푹 빠져들도록 내맡겨왔다. 그 밑바닥엔 어찌 되었든 좀 시간이 걸릴지라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려니 힘들긴 하더라.
문제는 진심이야, 이 사람아
『회남자』란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진심이 가슴 속에 있으면 움직일 때 자연스레 밖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을 담아 행동하면 비록 자잘한 실수가 있더라도 원망스러워하지 않지만, 진심이 없이 행동하면 비록 애썼더라도 미움을 받게 된다.
情繋於中, 行形於外. 凡行戴情, 雖過無怨, 不戴其情, 雖忠來惡. 『淮南子』
핵심은 情이고, 정은 경향성이다. 어딜 향하고 있고 어디로 가려 하는지다. 그러니 열나게, 무턱대고, X 빠지게 할 게 아니라 情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그 결과 어느 정도 임고반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부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며 한문공부의 매력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런 작은 성취에서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되는 거다. 『중용』 23장에 있는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잘 해야 한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욕심은 전혀 없으니, 차근차근 쌓아가기만 하면 된다. 나의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말이다.
지금 이순간의 행복을 향해
그럼에도 올핸 나에게 ‘운수 좋은 해’이기도 하다. 한문교육과에 새 교수님이 두 분이나 오셔서 호기롭게 전 학년 대상의 스터디를 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번 주부터 그 스터디에 참여했는데 아주 도전욕, 학구욕, 성실욕을 불끈불끈 일으키기에 충분하더라. 내가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정말 오랜만에 느껴봤다. 그 스터디가 재밌는 점은 1학년부터 나와 같은 늦깎이 임용준비생까지 다채로운 멤버들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다~
그러니 공부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그런 인연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무언가 꿈꿀 수 있다는 게 좋다.
▲ 후배들과 앉아 교수님이 진행하는 스터디에 함께 할 수 있으니 그것도 좋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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