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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1장 - 8. 기독교의 기도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1장 - 8. 기독교의 기도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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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독교의 기도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어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하는 것이다.
, 暗處也. , 細事也.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跡雖未形而幾則已動, 人雖不知而己獨知之, 則是天下之事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 是以君子旣常戒懼, 而於此尤加謹焉. 所以遏人欲於將萌,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 以至離道之遠也.
()은 어두운 곳이다. ()는 작은 일이다. ‘()’이란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아는 곳이다. 그윽하고 어두운 중에 작은 일 가운데에 자취가 비록 드러나지 않아도 기미가 이미 발동된 것이니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알더라도 이것은 천하의 일로 훤히 드러나며 밝게 나타나서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이미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함으로 이에 더욱 삼감을 더하는 것이다. 인욕이 장차 자라날 것을 막아야 하는 까닭은 은미한 중에 잠기듯 불어나고 은근히 자라나 도에서 떠남이 멀어짐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은 현으로 발음하는데 보인다는 뜻이에요. 여기의 은()과 미()를 합쳐서 요즘 우리가 잘 쓰는 은미하다라는 말이 성립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단어에서는 의미 없이 왜곡되어 버렸지만 원래 은미(隱微)라는 말은 중용(中庸)에서 나온 말이에요. 은미(隱微0라는 말이 곧 신독사상을 함축합니다. 중용(中庸)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신독(愼獨)사상입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홀로 있을 때 삼가한다는 말입니다. 홀로 있을 때 삼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기독교에 있는 신독사상이 바로 기도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어머니의 청교도적인(puritanical) 신앙의 생활 속에서 큰 사람입니다. 우리 어머니같은 분들은 완벽한 이조의 여인이에요.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볼 때 유학에서 말하는 신독이 근세의 기독교 신앙의 기도(祈禱)’ 사상으로 변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어머니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기도란 반드시 홀로 하는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시거든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린다면 서양인의 기도의 핵심은 단독자(Existenz vor dem Gott)’의 개념입니다.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외면적인 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나의 주관적 신독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122절에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Do not conform yourselves to the standard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wardly by a complete change of your mind. Romans 12.2)” 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신과의 단독적인 대면을 통해서 나의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기도사상이 청교도(Puritanism)의 본질이 되었고 막스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 윤리로 만들었습니다.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며 사는 사람은 돈을 벌어도 하늘나라에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속적으로 돈을 안 쓰고 저축을 합니다. 그래서 자본의 축적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죠. 그리고 직업(Vocation)이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것입니다. 보케이션(Vocation)이라는 말에는 직업(Profession)이라는 뜻도 있지만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해서 동양인들은 그러한 단독자의 내면적 윤리가 없고 사회적 체면만은 중시하는 피상적인 사회윤리만 있는데 그것이 곧 유교가 말하는 도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은 돈을 벌었다하면 우선 체면을 차려야 하기 때문에 잔치도 거하게 열어야 하고 사람들을 엄청나게 부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세에 돌아갈 하나님의 나라가 없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주지육림에 뿌려서 과시하게 되고, 그래서 동양에서는 자본이 축적될 길이 없었다는 뭐 이런 논리죠. 이태백도 술 연못에 빠져 죽었고 그런 가운데에서 시()는 나왔을지 몰라도 자본 축적은 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근세에 자본주의를 이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막스 베버가 지껄여 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가 하는 것은 일본, 대만, 싱가포르, 한국 등 유교 문명권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자본 축적이 진행되었다는 사례로 여실히 반증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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