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 공사와 진심 없는 말
02년 4월 6일(토) 폭우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진 진지 공사 기간이다. 폐바 첫 진지 공사이기에 대단히 걱정했던 게 사실이다. 여기 FEBA는 GOP와는 달리 빡세다는 진지 공사였기에 걱정이 절로 들더라. 지금에서야 느끼는 거지만 GOP 진지 공사는 진지 개척이 아니라 진지 청소 정도의 작업이니 그만큼 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FEBA의 진지공사는 진지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고 밤까지 진행되기에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역시 우리들의 예상대로 빡센 일주일이었다. 5시에 일어나 8시정도부터 작업에 들어가서 저녁 6시에 접어 들어서야 끝나는 일정이다. 내리쬐는 뜨뜻한 햇살을 등지고서, 또는 앞대고서 그 무수한 땀방울들을 흘려가며 대지의 끊임 없는 생명력에 맞서 새로운 방벽을 구축해야 한다. 거의 매일 매일을 토굴만 했기에(난 사실 삽질을 잘하지도 못하지만, 또한 삽질만큼 힘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르는 조나 견치석조犬齒石組는 오히려 짬짬이 쉴 시간이라도 있으니깐) 어깨, 오른쪽 손. 허리 그 모든 게 아파서 죽을 뻔했다. 막노동판과 똑같은 느낌으로 작업을 하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점은 오대기였다. 저번 주엔 어쩌다 한 번씩 상황이 걸렸기에 나름 여유가 있었지만 이번 주엔 전혀 달랐다. 실제 상황에 대한 오대기도 걸려서 저번 주처럼 그냥 모였다가 확인한 후에 헤어지는 그런 약식화된 오대기가 아니라, 모여서 선상고지까지 수색해야 하는 그런 FM 오대기였으니 말이다. 정말 힘들다 못해 짜증이 났다. 거기에 짜증을 폭발시킨 일은 연이틀 간 밤에 두 번이나 오대기가 걸렸다는 것이다. 잘 자고 있는데 한 번 걸렸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새벽 4시 정도 되어서 걸린 오대기는 아니다 싶을 정도의 오대기였고 거기다 수색까지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진지 공사로 엄청 피곤하고 힘든 데, 무슨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어젠 더욱 가관이었다. 비록 새벽 12시 반 정도에 한 번 밖에 안 걸렸지만 오대기가 걸려서 나가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도대체 지금 이렇게까지 오대기를 건 일직사관은 누구일까?’ 자못 궁금했고 미워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수 더 떠서 수색까지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에 쫄딱 젖어가면서 수색을 했고 철수 명령이 떨어져서 집합해 있었다. 그랬더니, 일직 사령님이 “진지공사 기간이라 너희들 다 힘든 거 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라는 하나 마나한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난 그 말에 혐오스러움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든 걸 다 안다면 이런 상황을 안 만들면 그만인 것을. 안다면서 오대기를 부른 걸로도 부족해 쫄딱 젖도록 수색까지 시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난 언제부턴가 말로 표현되는 것들에 대해 증오감이 싹트게 되었다. 말과 말로만 표현되는 진심없는 현실에 기가 질린 것이다. 이 놈의 군대란 곳은 말 하나가 단순한 말이 아닌 법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말처럼 쉬운 게 어디 있던가? 말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몸소 해보면 말과 행동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말도 나온 거겠지. 특히 지휘관들이 “이곳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깨끗히 치워라”라거나 “오늘 작업 진도는 이런 것들까지 하는 것이니까, 꼭 오늘 마무리 지어라”라거나 하는 말처럼 실제적인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희망사항을 마치 실제의 계획인양 하는 말들 말이다. 이런 말들은 실제적인 일뿐 아니라 관념적인 일에서 그대로 사용된다. “난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라든가 “넌 지금 이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지”하는 남은 다 파악해버렸다는 듯이 하는 말투가 그것이다. 말이 주는 허무맹랑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러므로 말의 위엄과 말의 신뢰감을 높여주기 위해서는 진심을 담아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한다. 그럴 때에야 일직사령관의 저 말도 진심어린 말이 될 수 있겠지.
말이 삼천포로 빠졌지만 진지 공사는 이런저런 이유도 정말 힘들었다. 특히 4월 5일은 식물일이란 공휴일이었다. 그런데 나가서 평소와 똑같이 작업을 해야 없다(원랜 오늘도 작업을 해야 했지만 밖에 비가 부슬부슬 끊임없이 내리는 관계로 모처럼 이렇게 푹 쉬고 있다). 이처럼 진지 공사 기간엔 애석하게도 휴식이 전혀 없단다. 어젠 그래도 그나마 굴토를 하지 않고 흙주물럭을 만들었기에 그나마 나왔다. 그렇게만 월을 패리면 진지 공사도 쉬울 텐데, 오늘 비가 와서 이렇게 쉬긴 하지만 다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주엔 더욱 힘든 진지 공사가 되려나? 괜한 기우(杞憂)를 해본다.
어떤 계급이든 힘듦이 있다
02년 4월 7일(일) 흐림
수요일부터 갑자기 부소대장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땐 다른 일이 있겠거니 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려 결근이란다.
예전에 GOP에 있을 때 중사가 탈영해서 A형 근무(철수 없는 전원투입 근무)를 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게 설마 사실이라고는 전혀 믿질 않았다. 자기가 택한 직업 군인을 그렇게 내버릴 것이라곤 전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병이 아닌 직업군인의 상황은 우리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렇게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일이 바로 내 주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늘 우리를 무섭게 대하셨기 때문에 그 이면에 흐르는 강인한 인상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막상 일이 이렇게 터지고 나니까 ‘열 길 물속, 한 길 사람 속’이란 속담이 얼마나 맞는 속담인지 새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우리가 그동안 부소대장님을 몰라도 한참이나 몰랐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미안한 마음과 함께 사람을 쉽게 판단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어떻게든 잘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진지화와 군인의 땀방울
02년 4월 7일(일) 흐림
오늘은 흐린 주일이었다. 그런데도 평일과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아마도 어젠 토요일임에도 비가 온 덕에 쉬었기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날조였기 때문에 재밌기만 하고 별로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주일이기에 네 시가 조금 넘어서 끝났다. 어찌 보면 쉬어야 할 날에 일한 것이라 짜증이 날 만도 하지만 이처럼 조그만 기쁨의 요소라도 있다면 행복이 느껴지는 게 또 군대의 묘미이기도 하다.
예전에 ‘철원의 모든 산이 진지화되어 있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진지 공사 기간에 ‘모든 산이 진지화 되어 있다면 그 모든 산엔 군인들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베여 있다’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너무 짜증 나지만 그만큼 수고하자! 오늘은 오살나게 추웠다. 비극이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진지공사를 끝내며
02년 4월 13일(토)
진지공사가 이주째에 접어 들었다. 몸 쓰는 일을 이주째 하고 있으니 이제는 힘이 팽긴다. 역시 몸을 써야 하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것 같다. 진지 공사가 이렇게 힘이 들 줄은 여러 얘길 통해 익히 듣긴 했지만 실제로 대하고 보니 무엇을 생각했든 그 이상이긴 하더라. 이럴 때만은 GOP가 너무나 그립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 생활에 적응되다 보니, 할 만하고 나름대로 재밌긴 했다(물론 끝났기에 이런 소리를 해보는 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군종이 된 지가 어언 한 달째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신고식 한 번 못해봤으며 군종으로서의 역할도 못해봤다. 그동안 오대기와 진지공사와 이것저것으로 바쁘다 보니 당연히 교회에 나갈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당연히 나설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상황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렇지만 이제 진지공사 막바지이니 조금만 있으며 군종의 일도 하게 될 날이 오겠지.
13일(토)은 진지 공사 마지막 날이다. 원래 어제 거의 마무리를 시켜놓고 오늘 사계 청소만 한 후 끝낼 생각이었지만 어제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오후 3시 정도에 황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남이는 어제 14박 15일의 긴 휴가를 끝내고 오늘 처음으로 진지공사에 투입했는데 이런 난리 아닌 난리를 당하고 나니 정말이지 군 생활이 더더욱 막막했을 거고 답답하기만 했겠지. 잘 적응해보자 상남아!
그렇게 철수해서 20시부터 5시까지 총 9시간을 자고서 오늘의 진지공사에 투입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전에 마무리 짓는 게 오늘의 목표란다.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작업장에 도착해서 열심히 날조의 임무를 다했다. 오늘은 다른 때완 너무나도 달리 날조가 매우 힘들었다. 흙벽돌이 만들어지는 족족 가지고 왔고 60에 떼가 실려올 때마다 그걸 또 날라야 했기에 쉴 시간이 눈꼽 만큼도 없어서 힘이 들었다. 거기다가 위에 있는 개인호 진지까지만 하는 게 아니라 코너까지 하다 보니까 당연히 작업량이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거기까지 이동하려면 진담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행히도 작업은 오후 2시에 마무리 되었다. 대충 대충이었지만 다들 최선을 다한 덕이다. 근데 늦게서야 끝날 줄 알았는데 점심 후 30분 후에 끝난 것이다. 다른 중대는 끝나지 않아 분주하게 작업하는 틈 뚫고서 뒷풀이로 막걸리를 들입다 퍼붓는 쾌감은 지금까지의 힘듦을 충분히 위로해줬다. 우리 중대만이 작업이 먼저 끝났기에 여러 부러워하는 눈빛들을 뒤로하고서 떠날 때는 절로 행복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다른 중대보다 그 공포의 호루라기 소리를 많이 들은 덕이려니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련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젠 호루라기라면 이가 갈릴 지경이다. 진지공사의 bye bye! 다신 하지 않길 바란다.
사족이지만 사실 진지 공사보다 뒷처리가 더 짜증났다. 특히 식간처리가 그랬는데, 그건 아직 짬이 안 된다는 증거겠지
중간의 일과 군종의 일
02년 4월 18일(목)
오늘은 그동안 장기집권하신 이규희 병장님이 견장을 떼신 날이다. 남윤길 병장님이 견장을 달게 되며 나는 당연히 소대의 중간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나와 상남이와 지용이와 박형국 상병과 김영주 상병, 이렇게 다섯이서 중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난 풀린 군번이기에 짧게 중간을 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긴 한다.
선임들은 뭔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카리스가 있는 중간이 되길 권유하지만 어디 나와 똑같이 여러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통제시킨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인가! 몇번 해보려고도 했는데 역시 감정만 상하고 짜증나기만 했다. 사실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윽박 질러야 하는 것이며 때론 욕도 스스럼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건 군종이란 명찰이 주는 것과는 다른 일이기에 갈등의 요소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이런 갈등 사이에서 두서없이 헛갈려 하고 있으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간의 역할을 하다 보면 사실 화가 너무 많이 나기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일 때도 있다. 감정을 잘 주체할 지혜가 필요하니 솔로몬의 기도처럼 명석한 지혜를 달라고 할 수 있어야겠다. 앞으로 갈굼을 많이 당할 것이다. 주의 일과 중간으로서의 일이라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해나가야 한다. 어떻게 하든 선임들로부터 혼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이 없이 나의 입장이 잘 전파될 리가 없기 때문에 난 더욱 집착스런 맘가짐으로 주의 일에 매진할 것이다. 비록 그러한 집착스러움이 뭔가 좀 월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니 그렇지만 그런 일을 하므로 내 자신이 느끼는 단점이나 행복감도 있으니까. 더욱 그렇게 하리라는 것이다. 기도할지어다. 솔로몬과 같이 지혜의 화신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주의 일과 중간으로서의 일이란 두 마리 토끼, 둘 다 잡으려고 하면, 큰 오산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간 헛 노력에 수많은 질타만이 쏟아져서 자리감만 커질 뿐이다. 그렇기에 난 한 마리 토끼를 잡고 또 그 다음에 다른 토끼를 잡는 여유 있는 고집스러움으로 일을 해나갈 것이다. 그 도중 도중에 많은 비난이 쏟아지고 많은 억압이 자리하겠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일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좀 더 행복할 것 같으니까. 이럴 때일수록 기도로서 주님께 의지하면서 조금씩 다가가고 조금씩 힘과 지혜를 달라고 바라는 게 좋겠다.
주의 일과 중간의 일, 가운데서 지금 많이 버거워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만이 앞선다. 이럴 땐 교회에서 교회일에 충실하고 내무실에서 중간으로서의 일에 충실하여 소홀함을 조금씩이라도 줄여감이 좋을 것이다. 좋은 훗날을 기약하며.
9월 14일(토) 차방문을 준비하며 교회 앞에서
대대장과의 회식과 군종으로서의 자리매김
02년 4월 19일(금) 맑음
군종으로서 주의 일을 하는 것과 상병로서 소대 일을 하는 것이 과연 통합될 수 없는 별개의 것일까? 사실 두 가지의 일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에, 누구나 알다시피 성격이 너무도 다른 일이기에 전혀 어울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이 두 가지 일을 얼마나 조화롭게 해나가느냐에 따라 군 생활을 잘하는 것이겠지. 그리기 위해서 진짜 생각을 많이 하고서 일을 잘 해나가야 하겠지.
주일(15일)과 월요일(16일)엔 최초로 군종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고대하던 군종으로서 첫 주일이 찾아왔다. 군종이 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이제야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까닭은, 그동안은 5대기에다 진지공사다 뭐다 해서 교회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다림 뒤에 찾아온 주일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일찍이 옷을 차려 입고 교회를 찾았다. 너무 이른 시간인지 아무도 없이 교회는 한산했다. 하지만 기분이 확 풀리며 자유스러워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여유로움이 행복이 아니던가?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다가 3주 만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모처럼’이란 말을 강조하는 데서 얼마나 기뻤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끔은 늘 해야 했던 것들을 잠시 멈춰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다림에 허덕이다보면 그 갈급함이 더욱 커져서 그 귀중함을 알게 될 뿐 아니라, 그 순간순간의 기쁨까지도 알게 된다. 그런 갈급함이 없인 늘 그 일상이 그 일상일 테니깐,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이렇게 맞이한 주일이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예배가 끝나고 성가 연습을 하려니 대대군종인 임대호 병장님이 대대장님이 찾는다면서 대대장실로 1시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기쁨의 물결이 몸을 사정없이 흔들어 댔다. 내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을 정도의 위치에 놓이게 됐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이런 행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함이 마땅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불려 갔기에 보통 떈 가까이 가지도 못할 대대장님실의 문을 열고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 같이 특이한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 방안에 책상 한 개와 컴퓨터 한 대만 놓인 허름하리만치 썰렁한 방이었다. 검소한 대대장님의 이미지가 그 방안에도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그곳에 사모님과 대대장님과 BN장 아들까지 셋이서 있었다. 우린 거기서 면담이나 할 줄 알고 좀 긴장된 맘가짐으로 갔는데 그게 아니라 군종들과 함께 오찬을 한다는 것이었다. 당황하지 않으려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에서 밖에 나가서 외식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으며 더더욱이 높은 계급(계급이 깡패인 군대에서 특히 그렇다) 대대장님의 식구와 밥을 먹게 될 줄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외식을 한다는 것과 최고의 계급을 지닌 이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현실이 되고 보니 어안이 벙벙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던 대대장님 차를 타고서 1중대 군종인 이현욱씨, 4중대 군종인 염원석씨, 대대 군종의 이현일씨, 대대 군종 사수의 임대호 병장님, 나 이렇게 다섯이서 외식을 가게 된 것이다.
장소는 동송읍내에 있는 안동 찜닭집이었다. 정말 미처 말로 못할 정도로 이렇게 밖에 나와 사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이 찡하도록 기뻤다. 거기서 대대장님과 얘길하면서 안동찜닭 대(大)를 두 마리 시켰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 알고 보니 그 자린 사모님께서 마련해준 자리였다. 언제나 신우들에 관심을 가져 주시며, 언제나 많은 부식을 챙겨주시는 사모님의 믿음과 애정은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던 차였는데 회식까지 추진한 걸 알게 되니깐 존경하는 마음까지 절로 생기더라. 대대장님은 참 복도 많으시다. 나도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면 사모님처럼 신실한 믿음의 사람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맛있었는데 먹다 보니 배가 불렀다. 그럼에도 배가 부른다고 말을 할 수는 없기에 비빔밥까지 다 먹고서야 그 생각도 못한 행복의 순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부대에 복귀해선 쉬이 헤어지지 못하고 교회에 가서 차방문에 대한 회의도 했고 배는 불렀지만 마지막으로 임대호 병장님과 함께 하는 주일이었기에 회식을 또 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바랐던 그런 주일이다. 그리고 이래서 군종이 되고 싶기도 했던 거다. 주일 내내 교회에서 지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FEBA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이 순간 이렇게 이루어지고 나니 좋다. 행복하다.
월요일에 최초로 1BN 내의 행정반을 돌며 차방문을 하게 되었다. 차방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청소와 점호에서 빠진 채 자유를 만끽하며 대대 내의 주요 장소들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더욱더 기쁜 것이었다. 이렇게 중대 군종으로서 주의 일을 해나갈 수 있어서 나한테도 위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주님한테도 영광이 되었을 테니까 이래저래 일석이조다. 아싸!
19연대 근무지원이 끝나는 마당에
02년 4월 26일(금) 서늘하지만 맑음
군에 와서 벌써 1년 2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 1년이란 시간을 남겨둔 시기에 이르렀다. 예전에 생각할 땐 군 생활이 1년만 남아도 되게 행복하고 생활은 엄청 편해질 줄만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그 시기에 도달하고 나니깐 그다지 아니올시다 라는 거다. 역시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가 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과연 병장이 되고 전역을 한다 해도 기쁠지 미지수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군 생활을 1년 2개월이나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는 거다. 거기에 덧붙여 아직도 1년이나 남은 것을 되짚어 보노라면 여전히 막막하고 답답하여 미칠 것 같다는 점이다. 과연 이 긍부정이 교차하는 혼란의 시기를 또 어떻게 보낼 것인가?
지금은 19연대에 근무지원을 나와 있다. 19연대에서 연대 종합전술 훈련 평가를 하느라 이번 주 내내 부대를 비우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들의 공백을 메워 주려 우리 중대가 여기로 지원 나온 것이다. 여긴 GOP의 생활과 거의 유사하다. 탄약고ㆍ위병소ㆍ고가초소 세 군데에서 AㆍBㆍC조로 편성되어 맞교대 식으로 밀어내며 근무를 서면 된다. 난 탄약고에서 2시간 근무를 서고 4시간 대기를 먹으면 되기에 훨씬 수월하다. 물론 대기 때는 어떠한 직업이나 어떠한 짜증 날 일도 없이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된다. 아무래도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두 시간 근무를 서야 한다는 건, 모처럼 만에 느껴보는 힘겨움이었기에 편하면서도 힘이 드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이렇게 요즘은 하루하루를, 물론 일주일이란 시간의 제약이 있지만, 이렇게 지내고 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군대가 아닌 것 같은 편안함에 기분이 한결 편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편함도 딱 일주일이라 제한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이 더욱 간절해지고 이 시간이 더욱 편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이제 이 시간도 내일이면 끝이라 생각하니 더욱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모든 일에 만약 끝이 없다면 어떨까? 아마도 능률도 안 오르고, 그 일을 하는 잠재적 재미 또한 없겠지. 끝이 없을 때의 안 좋은 점을 생각하기보다, 끝이 있을 때에 좋은 점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기에 후자에 대해 서술해보려 한다. 끝이 있다는 건, 우선 최선의 노력을 하게끔 한다. 끝이란 시간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그동안만은 열심히 해보려는 맘가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 끝의 절정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과정의 순간을 떠올리며 마지막 일정까지 불사르게 되니, 좋은 일이라 볼 수도 있다. 끝이 있다는 건, 순간순간의 아픔과 고통을 참아내게 한다. 끝이 없이 그런 일이 늘 해야만 한다면 누가 그걸 참으며 견디어 나가겠는가?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싶어지겠지. 끝이 있다는 게 이런 이유 때문에 정말 좋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내일이면 이 생활도 끝이다. 그렇게 끝난 뒤엔 다시 복귀하여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싫든 좋든 이렇게 흘러가는 게 삶이다.
19연대와 2연대 전격 비교
02년 4월 26일(금) 서늘하지만 맑음
19연대 모든 시설이 우리 연대나 우리 대대의 것보다 좋았다. 특히 철제 관물대, 통합 막사는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계속 부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신교대 동거인 민명기를 거기서 우연하게 만났는데, 19연대 안의 상황을 세세히 들었기 때문이다. 19연대에서 구타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저번엔 한 주 단위로 미복귀자가 있어서 골치였고 며칠 전에 탈영자가 있어 한참 수색을 하다가 거의 포기했는데 교회에서 연락해준 통에 찾았단다. 그런 사건, 사고에 비하면 우리 연대와 우리 대대와 우리 중대는 사고가 정말 없는 편이다. 저번에 있었던 휴가 미복귀자 한 명이 있었던 걸 제외하고선 모두 조용히 편이다. 그 외에 구타사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쩌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이니 있을 뿐이지, 빈번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니깐 살만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19연대가 얼마나 빡센 곳인지를 여실히 알겠더라.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주신 축복이자 행운이 아닐까.
신교대 시절에 문득 2연대로 떨어지길 바라던 게 생각났다. 왜 GOP 연대도 가고 싶었는지 확실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아마도 19연대의 빡셈을 익히 들어서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2연대, 7연대, 19연대 순으로 가고 싶었었다. 그런 바람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딱 내가 원하던 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지금도 남보란 듯이 2연대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되어서 정말 행복하고 나의 바람 하나하나를 이렇게 이뤄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린다.
아버지 군번의 전역을 축하하며
02년 4월 26일(금) 서늘하지만 맑음
오늘 아버지 군번이었던 이규희씨와 임대호 씨가 집에 갔다. 두 분 다 나의 군생일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었기에 왠지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규희 씨는 우리 부대 선임으로서 분대장을 거의 10개월 정도 잡았기에 그런 면에서 좋은 모습, 그렇지 않은 모습을 다 마주하며 군 생활의 모범을 제시하는 아버지였고, 임대호씨는 우리 소대 출신이지만 대대군종이었기에 신앙적인 면에서 모범을 제시하는 아버지였다.
특히 이규희씨에게 미안한 게 많은데, 이등병 시절에 갑자기 아파서 근무를 설 수 없을 때, 비번임에도 그걸 포기하면서 근무를 서줬고, 백일휴가 즈음해선 일개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옷을 다려줬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미안한 일은 누가 뭐라 해도 GOP 때 사진기 사건과 암구호 빵구 사진 때문에 날 때리던 소대장님을 말리려다 뺨까지 맞고서 같이 군장을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고서 연병장을 돌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 당시의 난 미안한 마음이 있었으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사과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난 떳떳하단 생각에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그네들에게 오히려 신경질을 냈었다. 연거푸 짧은 시간 내에 세 가지 사건이 터지며 크게 위축되어 있었기에 사람들의 나에 대한 행동들이 공격으로 느껴져서 그런 거겠지. 그런 신경질적인 마음은 계속 되어서 페바에 나와서 군종이 되던 순간에도 보고를 안 하고 그냥 결과만 통보하는 통에 티격태격하며 말이 많았다.
이렇듯 말도 많고 탈도 많았기에 나가시는 마당에도 나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넌 정말 재미없어. 넌 머리도 있고 괜찮은 것 같은데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야. 특히 이제 중간이잖아. 중간이면 너의 계획과 고참들의 통치 방법이 다르니까 많이 싸워야할 시기인데, 넌 아직도 갈굼을 당하고 있으니까 한심할 정도다. 좀 더 열심히 하려 해야 하고 좀 더 융통성 있게 생활했으면 좋겠어.”라고 말씀했다. 사실 ‘넌 재미 없어’와 ‘내가 보기에는 군 생활 잘하는 거 같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용준이나 현우한테는 “잘하고 있고 그렇게만 군 생활해라. 그렇게 하다 보면 인정 받을 거야”라고 상반된 반응의 얘기를 하는 걸 들었을 땐 너무도 비교가 확 되어 기분이 안 좋았다. 어쩔 것인가 나 스스로 군 생활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을뿐더러 열정도 그만큼 없는 것임을. 그렇지만 아직도 갈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엔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좀 더 체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어쨌든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며 1년 남은 군 생활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래저래 이규희씨는 나의 아버지 군번으로 이처럼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중대 군종이기에 임대호씨는 인간적으로 따르고 싶던 존재였다. 이를테면 신앙의 뿌리라고나 할까? 모든 사람에게 편한 사람이었으며 교회에 관련된 일에서 인정 받던 형제이기에 나도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맘이 절로 들었다. 물론 나도 할 수 있다는 저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일 테지만 그 본보기는 임대호씨가 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떠나 다시 볼 순 없다고 하니 아쉽기만 하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분야에서 나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이 인사를 하면서 영영 떠나가니 너무나 아쉽고 쓸쓸해졌다. 두 사람 모두 이제 전역이란 꿈을 이뤘으니, 더 높은 이상을 향해 더 큰 나래를 맘껏 펼쳤으면 좋겠다. 살펴가십시오, 아버지들이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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