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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육분 - 6.8 以是義故 ~ 何況非法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육분 - 6.8 以是義故 ~ 何況非法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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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여기 비교적 길었던 제6(第六分)의 총결론이 제출되고 있다. 앞서 이 책의 모두에서 내가 말했듯이 종교는 교설(敎說)이 아니다. 부처님의 설법 그 자체가 종교가 아니요, 그 설법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귀한 휴지라도 밑을 담으면 버려야지, 그것이 귀하다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면 쿠린내만 계속 날 것이다. 기독교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런 쿠린내 나는 휴지쪽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뗏목()의 비유는 참으로 기발한 것이다. 강이 많은 지역에서 생활한 인도사람들에게서 생겨난 지혜의 비유인 것이다.

 

이승
속세
윤회(saṃsāra)
→ ⊡ →
뗏목
저승
열반(nirvāṇa)
해탈(mokṣa)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다 할 때에 우리는 뗏목과 같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자! 어렵게 뗏목을 구했고, 뗏목은 아주 훌륭한 나무로 곱게 다듬어져서 잘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이 뗏목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던가? 그래서 뗏목이 저쪽 언덕에 도착을 했는데도, 뗏목이 좋고 뗏목이 아름답고 뗏목이 귀하여 그냥 뗏목 속에 주저앉아 있다면 도대체 어느 날에 피안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무리 어렵게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진정한 신앙인은 예수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만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方便)’의 사상은 결코 간단한 사상이 아니다. 인류최고의 지혜를 결집한 두 마디인 것이다: 황 삐엔!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파미르고원이라는 지형상의 조건 때문에 격절되고 차단되어 완벽하게 교섭이 없던 시절, 붓다가 살아있던 그 시절 그 즈음에, 중국에는 노자(老子)장자(莊子)니 하는 성인이 살고 있었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荃者所以在魚
전자소이재어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야 한다. 得魚而忘荃
득어이망전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蹄者所以在免
제자소이재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버려야 한다. 得免而忘蹄
득토이망제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言者所以在意
언자소이재의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得意而忘言
득의이망언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나는 언제 그런 사람과
吾安得夫忘言之人
오안득부망언지인
더불어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而與之言哉
이여지언재

 

 

장자(莊子)의 제일 마지막 말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한다.” 여기에 바로 방편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장자가 죽은 약 45세기 후에 장자를 만나러 중국에 왔다. 이 두 위대한 영혼은 그리운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전기(轉機)의 출발이었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출발이요, 이것이 격의불교의 시작이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대규모의 문명교류의 시발이었다.

 

같은 시간,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 두 거인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중국인의 프라이드요, 한 사람은 인도인의 프라이드다. 주앙쯔(莊子)는 승가를 만들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싯달타에 뒤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중국인의 불교이해는 모두 이 노장(老莊)사상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불교가 그 궁극에 있어 ()’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은 불교이해의 노장적(老莊的) 격의(格義)를 노출시킨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서는 라오쯔ㆍ주앙쯔가 있다. 인도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서는 싯달타가 있다. 우리 조선문명도 끊임없이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하여 왔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지구상의 모든 근대성(Modernity)을 표방한 사상체계를 앞질러 간 동학사상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동학혁명으로 구체화되었다. 31독립만세의거, 제주43민중항쟁, 여순민중항쟁, 419혁명, 518민중항쟁, 876월 항쟁,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역사의 저류에는 우리 생각, 우리 사상, 우리 느낌이 배어있다. 이제 우리 고조선의 후예들은 주앙쯔, 싯달타, 예수를 뛰어넘고, 룻소, 칸트, 헤겔을 뛰어넘는 우리들 자신의 논리와 이념을 형성해야 한다. 시호(時乎, 때로다)! 시호(時乎)!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개벽의 때다!

 

 

 

 

인용

목차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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