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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제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제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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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앎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

문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우주론적 명제를 윤리적 명제로

 

 

이런 구절은 해석이 좀 어렵습니다. 물론 산스크리트 대응구가 있기는 하지만 현장(玄奘)의 번역이 매우 압축된 것이래서 주석가들은 자기 생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구절은 현장의 한역을 그대로 존중하여, 그 한자의 의미맥락대로 뜻을 새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는 여태까지 전개되어온,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래의 모든 기존 불교의 이론을 부정해버리는 ()의 철학을 완성하는 마지막 구문입니다. 그리고나서 보리살타" 즉 보살이라는 대승의 주체가 주어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대승의 탄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이전의 어떠한 종교와도 획을 긋는 새로운 종교운동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선 문법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는 구절은 앞 문장을 수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뒷 문장에 종속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도 없고 또한 득()도 없다. 무소득인 까닭이다가 되겠지요.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지도 없고 또한 득도 없다에서 문장이 끝나고, ‘무소득인 까닭에 보리살타는 ……하고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을 보면 보리살타 다음에,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라는 까닭을 밝히는 구문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무소득고는 앞으로 붙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자아~ 이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는 구절을 해석해야 할 차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기존의 이론적 개념에 의하여 경지불이(境智不二, 대상과 주관이 하나가 되는 경지)’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니 하고 막연하게 해석하는데 나는 그런 해석에 반대합니다. ‘무지역무득은 여태까지 진행되어온 반야사상의 우주론적ㆍ인식론적 측면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일상론적ㆍ윤리학적 테마를 제시하는 구절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태까지 펼쳐온 우주론적 테마, 치열한 부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평이하게 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여기 ()’는 반야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냥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도 뭘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안다고떠들어대는 데 있습니다. 반야는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얻음’, ()’이라 하는 것도 인간이 반야를 통해 뭘 자꾸만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반야을 통해서는 얻는다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알아지는 것도 없고 얻어지는 것도 없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동방의 사람들은 노자의 이런 구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속적 배움을 행하면 매일 얻어지는 것 같은데, 내가 말하는 도를 행하면 매일 손해 보는 것(=잃어버리는 것) 같다. 도덕경48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논어』 「계씨에도 공자말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람이 늙어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뭘 자꾸만 얻어야 한다고 욕심 내는 것이다.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

급기노야 혈기기쇠 계지재득

 

여기 공자말씀에도 ()’이라는 글자가 있어요. 반야심경을 읽을 때도 조선인들은 당연히 논어의 득()을 생각하지요.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것은 반야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도덕적 명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지()를 버리고 득()을 버려라! 왜냐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여기 무소득(無所得)’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무소득이라는 말은 이미 법정(法頂) 스님께서 무소유라는 말로 충분히 대중을 설득시키셨고 또 그것을 돌아가시기 전에 완전히 실천하셨기 때문에 우리 대중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본인의 저술조차도 족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 모든 판권을 회수하셨습니다. 아마도 스님의 출판된 글로서는 제 금강경강해의 서문으로 남은 글이 유일할지도 모르겠네요. 공수귀향(空手歸鄕)을 실천하신 참 드문 분이지요. 법정 스님은 제가 생전에 많이 만나뵈었지만 참 깊은 인격을 갖춘 분이지요. 글을 보면 매우 여성적이지만 만나뵈면 임제와도 같은 단호함과 강인함이 있는 분이었어요. 보조지눌의 맥을 잇기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송광사 학인들 중에서 앞으로 법정 스님을 뛰어넘는 인재들이 계속 배출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산스크리트어본의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에 해당되는 나 즈냐낭 나쁘라쁘띠흐(na jñānaṃ na prāptiḥ)’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즈냐낭(jñānaṃ)’지혜가 아니라 단순히 안다는 계열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소승불교가 얘기해 온 모든 이론을 안다는 것이죠. 여기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소승적 이론을 안다고 하는 것의 무의미성, 모든 이론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승비구들은 이러한 앎을 통하여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경지를 얻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나의 금강경강해9분을 볼 것. 그곳에도 계속 ()’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앎이 없으므로 이러한 경지의 획득도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서 소승적 앎과 지향의 목표가 사라질 때 진정한 대승의 경지가 새로 전개되는 것이죠.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야말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넘어가게 되는 반야의 추뉴(樞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포가 없고 전도몽상이 없는 진실불허한 신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팔만대장경 경판의 심경에는 무 자가 ()’()’가 번갈아 쓰였는데 기실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리드믹하게 배열한 것 같습니다.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사람들의 심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합니다. 다음 강의 가애(罣礙)’의 애()도 가장 간략한 ()’를 썼습니다.

 

 

 

 

인용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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