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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양화 제십칠 - 7. 반역에 성공한 필힐이 공자를 초빙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양화 제십칠 - 7. 반역에 성공한 필힐이 공자를 초빙하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14.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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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반역에 성공한 필힐이 공자를 초빙하다

 

 

17-7. ()나라 중모(中牟) 땅을 거점으로 모반한 필힐(佛肹)이 당시 유랑중이었던 공자를 초빙하였다. 공자는 여기에 가담하러 가려하였다.
17-7. 佛肹召, 子欲往.
 
자로(子路)가 말하였다: “예전에 저 유()가 부자(夫子)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사온데, ‘손수 그 몸에 불선(不善)을 행하는 자 밑으로는 군자는 들어가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필힐은 중모읍(中牟邑)을 거점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데 부자께서 가시려하시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니이까?”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子曰: 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러하다. 내 일찍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느니라.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더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내 어찌 박이 될 수 있겠는가? 어찌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않고 댕그렁 넝쿨에 매달려 있기만 할 수 있을손가!”
子曰: “.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필힐(佛肸)은 진나라 대부로서 조간자(趙簡子)의 영역 속에 있는 중모 (中牟)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서쪽으로 비정됨 땅의 읍()였는데, 조간자의 전횡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청나라 학자들은 좌전의 기사에 의거 하여(애공 5, 공자 62세 때), 필힐이 조간자의 신하가 아니라, 조간자와 필적하는 가로(家老), 범씨(范氏)ㆍ중행씨(中行氏)의 가신이었는데 조간자가 이들 범씨ㆍ중행씨를 토벌하는 상황에 이르자, 중모의 재였던 필힐은 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중모읍을 위()나라에 귀속시키고 조간자에게 항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필힐의 행동은 단순한 모반이 아니라 조간자의 전횡에 항거하는 어떤 독립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자로의 비판에 공자가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 좀 옹색한 입장이 되었지만, 사실은 공자로서는 자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초청하지 않는 상황에서, 기존의 세력과 신흥세력의 역사적 시비를 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자는 자기의 이상의 정치적 실현에 헌신하는 만큼 어떤 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적으로 옹색한 변명을 해야만 했던 공자의 행동을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어에 그 생생한 사료로서 올려놓은 편집자들의 위대한 결단에 우리는 경복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고뇌하는 공자의 모습을 우리는 지켜볼 수 있다.

 

이 사건을 공자세가(孔子世家)애공 2(BC 493)경에 배열해 놓았는데, 실제로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는 정확히 확정지을 길이 없다. 제일 마지막에 바가지 운운하는 대목은 해석이 어렵다. ‘계이불식(繫而不食)’은 능동적으로 자기의 생을 개척하지 아니 하고 표주박처럼 덩굴에 매달려 있기만 하는 신세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용

목차

전문 / 본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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