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성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6a-2. 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간의 성(性)이란 여울목에 잠시 고여있는 물과도 같습니다. 동쪽으로 물길을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물길을 트면 서쪽으로 흐릅니다. 인성(人性)이 본시 선(善)이다 불선(不善)이다 하는 우리의 관념으로써 분별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물이 그 자체로 동쪽이다 서쪽이다 하는 방향성이 결정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에 비유될 수 있겠소.” 6a-2. 告子曰: “性猶湍水也, 决諸東方則東流, 决諸西方則西流.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 猶水之無分於東西也.” 맹자께서 이를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선생의 말씀은 매우 명료하오. 물은 진실로 선생의 말씀대로 동ㆍ서를 가리지 않는다 할 것이 요. 그러나 과연 상ㆍ하의 분별조차 없다고 할 수 있으오리이까? 물은 본시 그 자체로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소. 인성(人性)이 본시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는 것과도 같소. 인성은 선하지 아니 함이 없고, 수성(水性)은 아래로 흐르지 아니 함이 없소이다. 지금 대저 물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튕겨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훌쩍 넘어갈 수도 있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 역류시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게도 할 수 있소. 그러나 어찌 이런 현상을 물 그 자체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될 뿐이오이다. 사람 또한 불선(不善)을 행하도록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 본래적 성(性)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 본성에 어긋나게 격발되듯 잘못 격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외다.” 孟子曰: “水信無分於東西. 無分於上下乎?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今夫水, 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 其勢則然也. 人之可使爲不善, 其性亦猶是也.” |
외면적 논리는 매우 명료하다. 고자는 평면적 동ㆍ서를 말함으로써 물 자체에 방향성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인성(人性)에는 선(善)ㆍ불선(不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확인한다. 제1장의 ‘기류(杞柳) - 배권(桮棬)’의 논의를 좀 더 명료하게 확산시킨 것이다. 기류 자체에 의(義)ㆍ불의(不義)를 논할 수 없는 것과도 같이 물[水] 그 자체의 선(善)ㆍ불선(不善)을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맹자의 논박은 외면적으로 매우 기발한 듯이 보인다. 동ㆍ 서의 우연성에 대하여 상ㆍ하의 필연성을 제시함으로써 물자체에 ‘취하(就下)’의 성질이 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따라서 인성(人性) 그 자체에 ‘취선(就善)’의 성질이 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인성지선야(人性之善也), 유수지취하야(猶水之就下也)’라는 문장에서 앞 문장은 ‘인성지취선야(人性之就善也)’로 바꾸어야 그 의미가 명료해진다. 사실 맹자도 인성 그 자체를 전적인 선으로써,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 성선(性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취선(就善)’의 가능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존재론적으로 성선(性善)을 규정한다면 악의 가능성은 일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인세(人世)를 설명하는 현실적 이론이 될 수가 없다. 맹자도 후천적, 인위적 세(勢)에 의한 악의 가능성을 인성(人性)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의 논의가 매우 설득력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레토릭의 장난일 뿐, 실제로 맹자의 논리로써 고자의 주장이 논파되는 것은 아니다. 결저동방(決諸東方), 결저서방(決諸西方)의 ‘결(決)’의 사건 속에서 완전한 기하학적 평면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상하의 입체감이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자의 ‘결(決)’의 논리 속에는 이미 맹자의 ‘취하(就下)’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논리는 한낱 비유일 뿐, 정확한 사실의 입증이 될 수가 없다. 물이 취하하는 것도 물 자체의 성질일 수 없으며, 그것은 오직 중력에 의한 위치에너지의 변화일 뿐이다. 자연현상 속에서 물은 취하의 성질만 갖는 것이 아니라 취상(就上)의 성질도 갖는다. 모세관현상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취상할 수도 있고, 기화현상에 의하여 하늘로 올라가기도 한다. 따라서 맹자의 논의는 고자의 논리를 논하는 정밀한 논의가 될 수가 없다. 맹자도 세(勢)에 의한 악(惡)으로의 취향을 인정하였다면 그가 말하는 ‘성선(性善)’도 선단(善端)의 확충이라는 과정론적 논의(the Process-philosophical argument) 그 이상의 주장은 아니다.
맹자의 논의를 레토릭의 승리로 간주하는 일체의 논문은 천박한 것이다. 맹자가 애타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취선(就善)의 가능성이 인성 내에 강한 힘으로서 내재한다는 그의 신념일 뿐이다. 어떠한 표면적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이 ‘힘’에 대한 신념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맹자 그 인간이 견지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인지가사위불선(人之可使爲不善)’은 문법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不善)을 행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라고 번역되는 문장이지만,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는 의미가 전후맥락상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람이 불선을 행하는 일이 있는 것도 …’ 정도로 의미를 완화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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