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본성에 대한 고자와 맹자의 논의
6a-3. 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성(性)이라고 하오이다.” 6a-3. 告子曰: “生之謂性.”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성(性)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흰 것을 희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오니이까?” 孟子曰: “生之謂性也, 猶白之謂白與?” 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소이다.” 曰: “然.”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흰 깃털의 흼과 흰 눈의 흼은 같은 것입니까? 그리고 또 흰 눈의 흼과 흰 옥돌의 흼은 같은 것입니까?” “白羽之白也, 猶白雪之白; 白雪之白, 猶白玉之白與?” 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소이다.” 曰: “然.”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개의 성(性)과 소의 성(性)은 같은 것이며, 또한 소의 성(性)과 사람의 성(性)은 같은 것이오니이까?” “然則犬之性, 猶牛之性; 牛之性, 猶人之性與?” |
이 장에 대해서도 수없는 논의가 있고 갖가지 학설이 난무한다. 아마도 채록자가 매우 간결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뒤끝 없이 절록하여 편집해버렸기 때문에 더 많은 논의가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많은 학설을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출전에 호소하지 않고 약술하겠다.
우선 고자가 말한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결코 맹자의 논리에 의하여 반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자의 논리의 정당성만을 입증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고자의 논리의 부당성을 논증하려는 시도는 결코 맹자의 논리조차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고자의 입장을 압축하고 있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는 이 한마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는 「계사(繫辭)」의 말과도 같이, ‘생지(生之)’를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과정’ 혹은 ‘끊임없이 창조하는 힘’ 그것을 성(性)이라고 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적 명제가 될 것이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새로운 창조를 계속하는 과정 그 자체 내에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 깃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자가 이런 심오한 총체적 우주론적 의미를 여기에 담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자의 사상에는 이러한 과정철학적 측면이 분명 내재한다는 것도 우리가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생지위성(生之謂性)’ ‘태어난 것, 그것을 성이라 부른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이것은 태어난 이후의 사태만에 한정짓는다는 의미로써 ‘생지(生之)’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性)은 선천(先天)과 관련이 없고, 오직 후천의 사태로 귀속되는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 형성되는 것이 성(性)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가 다 완성된 이후에도 선천과 후천의 명료한 구분은 가리기가 어렵다. 인간이 고고성(呱呱聲)을 터트리기 이전의 성과 이후의 성을 나눈다는 것은 별로 크게 인간의 성(性)을 논하는 데 주요한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고자의 시대에 선천성과 후천성에 관한 명료한 개념적 기준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상의 두 해석을 좀더 유연하게 종합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셋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해석은 이것이다: ‘생겨난(태어난) 그대 로의 모습을 성(性)이라 한다.’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해석에는 우선 선천성과 후천성의 확연한 구분이 개재되지 않는다. 선천적 영향이든, 후천적 영향이든, 생겨먹은 대로, 즉 자연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대로의 모습이 성(性)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자의 주장이 노리고자 하는 핵심적 의미는, 인간의 성(性)에 대해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선(善)ㆍ불선(不善)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자는 인간의 생리적(生理的)ㆍ자연적(自然的) 현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으며 그 출발점에 도덕적 색깔을 입히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맹자는 출발점 그 자체가 도덕적이어야 하며, 초월적이어야 하며, 생리적 현실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을 맹자는 인성에 고유(固有)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고자와 맹자, 양인(兩人)은 논의의 출발점이 다르다. 따라서 경기의 트랙이 다른 마당에, 그 우열이나 시비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본 장의 디스꾸르는 하등의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맹자를 공자의 적통으로 보지만, 사실 맹자는 공문(孔門)의 이 단(異端)이다. 범용한 공문의 적통에서 본다면 맹자는 매우 특이한 사상가일 뿐이다. 공자는 『논어(論語)』에 성(性)에 관하여 단 두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 그 중 하나는 자공이 공선생님께서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부정적 멘트일 뿐이다(5-12). 그러나 이 멘트를 가지고서 공자가 성(性)이나 천도(天道)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 무관심했다든가, 무지했다든가 하는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공자는 성(性)이나 천도(天道)에 관하여 충분한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소재는 새롭게 일어나는 사(士) 계층의 교육에 관한 것이었으며, 본인의 삶 자체도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하는 호학(好學)의 상향(上向) 노력이었다. 따라서 현실적 인간의 배움에 대한 격려에만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 성(性) 그 자체에 관한 논의, 특히 논쟁적 주제로서의 성(性)에 관한 담론은 공자의 삶에서 부각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성(性)에 관하여 매우 명료한 입장을 밝혔다(17-2).
태어난 그대로의 성(性)은 모든 사람이 서로 가깝다. 그러나 후천적 학습에 의하여 서로 멀어지게 된다.
性相近也, 習相遠也.
이 ‘성상근(性相近), 습상원(習相遠)’이라는 공자의 한 말씀이야말로 동아시아 2500년의 성담론(性談論)의 가장 적통한 기준이라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인간은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에는 보편적인 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공통성에 대해서도 공자는 칸트의 선의지나 룻소의 보편의지처럼 절대적인 공통성향으로서 전제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서로 가깝다[相近]’고 하는 매우 애매한 표현을 쓴다. ‘가깝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보편적이다’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현실태를 기준으로 모두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비슷한 성향에 대해서도 어떤 도덕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를 선호하는 선택적 의지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 준거가 되는 보편적 도덕법칙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성상근(性相近)’은 맹자보다는 오히려 고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에 가깝다. 회암(晦庵)이 성(性)을 ‘인지소득어천지리(人之所得於天之理)’라 하고, 생(生)을 ‘인지소득어천지기(人之所得於天之氣)’라 하여, 리(理)ㆍ기(氣)로 구분하고,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로 분별하여 규정한 것은 전혀 공자의 적통에서 벗어난 생소한 담론일 뿐이며 맹자의 논의조차 정밀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생(生) | 성(性) |
인지소득어천지기(人之所得於天之氣) | 인지소득어천지리(人之所得於天之理) |
기(氣) | 리(理) |
형이하자(形而下者) | 형이상자(形而上者) |
지각운동(知覺運動) | 인의예지지품(仁義禮智之稟) |
요즈음 간백자료에서도 명료하게 입증되듯이 선진시대에는 ‘생(生)’이라는 글자와 ‘성(性)’이라는 글자의 구분이 없었다. 성(性)은 곧 생(生)이었고, 생(生)은 곧 성(性)이었다. 따라서 성(性)이 도덕적 함의를 지니는 절대적 본질로서 생(生)에서 분리되어 형이상자화(形而上者化)되지를 않았다. ‘습상원(習相遠)’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후천적 학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맹자가 인간의 성을 생긴 그대로의 모습이라 말한다면, 흰 것을 희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가라고 질문한 것은 타당하다. 흰 것은 생긴 그대로 흰 것이요, 그것이 희기 때문에 희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성 이 생긴 그대로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다음의 논리로서 비약시킨 것은 정당치 못하다. 흰 것을 희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인 경험명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흰 깃털의 흼과 백설의 흼과 백옥의 흼이 다 동일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고자가 ‘불연(不然)’이라고 대답했어야 마땅하다. 맹자는 유도질문을 통해 고자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이다. 백우(白羽)의 흼과 백설의 흼과 백옥의 흼이 같다고 했을 때의 ‘흼(Whiteness)’은 경험적 사태가 아닌 개념적 보편자(the universal)의 문제이며 그것은 경험적 사태와 무관한 언어적 사태이다. 백우의 흼과 백설의 흼과 백옥의 흼은 경험적 판단 속에서는 같은 흼이 될 수가 없다. 흼의 기준이나 질감이 다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힘이라는 보편자와 같은 논리방식에 의하여 개의 성(性), 소 의 성(性), 사람의 성(性)이 동일하다고 하는 논리는 도출될 수 없다. ‘희다’는 것은 술부적 사태이며, 형용사적 사태이다. 그러나 ‘성(性)’이라는 것은 ‘희다’와 같은 술부적 사태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주체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것은 주어적 사태라고 보아야 한다. 희다의 ‘흼’과 같이 인간으로부터 단순하게 추상화될 수 있는 성격의 그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맹자의 논리는 고자의 주장의 어느 측면도 정확하게 반증하지 못한다. 단지 레토릭의 장난에 그쳤을 뿐이다.
단지 이 장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고자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을 말했고, 맹자는 인간의 성(性)을 생긴 그대로서만 인정해버린다면 인간의 성(性)은 개나 소의 성(性)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은 금수의 자연지성(自然之性)과는 다른 것으로, 인의예지라는 도덕성을 함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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