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은 내재하고 의는 외재한다
6a-4. 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식욕(食欲)과 색욕(色欲)의 자연스러운 성향이 성(性)이올시다. 그리고 인(仁)은 사람 안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며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義)는 사람 밖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며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6a-4. 告子曰: “食色, 性也. 仁, 內也, 非外也; 義, 外也, 非內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무엇에 근거하여 인(仁)은 내재적이고 의(義)는 외재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오니이까?” 孟子曰: “何以謂仁內義外也?” 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일례를 들자면, 장자(長子)를 공경하는 것을 의(義)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장자로 대접하는 것이지, 그 나이먹음이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올시다. 나이먹음은 나 밖에 있는 객관적 사태일 뿐입니다. 저것이 희기 때문에 내가 희다고 말하는 것은 그 흼이 저 밖에 객관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 흼을 따라 희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의(義)는 외재적이다라고 말씀드린 것이외다.” 曰: “彼長而我長之, 非有長於我也; 猶彼白而我白之, 從其白於外也, 故謂之外也.” 맹자께서 이를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흰 말을 보고 희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흰 사람을 보고 희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沃案: 앞의 ‘이어(異於)’는 연자로서 제거하여 읽는다】. 그렇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이 많이 먹은 말을 쳐다보고 꽤 늙었구나 하는 것과 나이드신 어른을 쳐다보고 연장자로서 존경심이 드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단 말입니까? 분명 차이가 있겠지요. 생각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다고 하는 객관적 사실이 의(義)이겠습니까? 나이를 잡수신 어른으로서 대접하는 나의 내면의 마음이 의(義)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는 내면적인 것이지 외면적인 것일 수가 없습니다.” 曰: “異於白馬之白也, 無以異於白人之白也; 不識長馬之長也, 無以異於長人之長與? 且謂長者義乎? 長之者義乎?” 고자께서 다시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누구든지 자기의 친동생은 자연스럽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먼 나라인 진국(秦國)의 어떤 낯선 사람의 동생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내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그것이 나에게 만족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인(仁)이며, 그래서 인은 내면적이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머나먼 초(楚)나라 사람이라도 어른이라면 어른 대접하게 되고 또한 나의 집안의 어른이라도 똑같이 어른 대접하게 되는 것은, 친소(親疏)에 관계없이 어른이라는 객관적 사태 그 자체가 나에게 만족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의(義)이며, 그래서 의는 외면적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曰: “吾弟則愛之, 秦人之弟則不愛也, 是以我爲悅者也, 故謂之內. 長楚人之長, 亦長吾之長, 是以長爲悅者也, 故謂之外也.” 맹자께서 고자의 논리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저 먼 진(秦)나라의 불고기가 맛있는 것은 우리집의 불고기가 맛있는 것과 별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진나라의 불고기와 우리집 불고기의 외재적 존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맛있어하는 내재적 미감(味感)의 공통성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불고기를 맛있어 함과 같은 이치가 있습니다. 장자를 존경하는 것이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외재적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불고기는 외재적 사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맛있어 하는 나의 미감(味感)조차도 외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식욕과 색욕이 곧 인간 본연의 내재적 성(性)이라고 하는 선생의 학설과 상치되는 것이 아닐까요?” 曰: “耆秦人之炙, 無以異於耆吾炙. 夫物則亦有然者也, 然則耆炙亦有外與?” |
원문으로만 그 뜻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번역과정에서 숨어있는 연결고리들을 드러내어 치밀하게 구성하였다. 이 장에 대해서도 쟁점이 되는 것은 너무도 많으나 그동안 내가 고민한 문제만 간략히 서술하겠다. 우선 ‘식색성야(食色性也)’라는 이 한마디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는 앞 장의 논의를 매우 명료하게 규정지워준다. 즉 우리가 ‘생지(生之)’의 본의를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결국 ‘생겨먹은 대로’ 혹은 ‘태어난 대로’의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정당성은 바로 ‘식색(食色)’이라는 이 한마디로써 보장된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사실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생겨먹은 그대로의 모습의 가장 원초적인 성향은 식욕과 색욕의 성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향에 대해서도 너무 쉽사리 ‘본능(本能, instinct)’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본능(本能)’이라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하다’는 뜻일 뿐이며, 본능의 실내용에 관해서는 함부로 우리의 가치판단을 부여해서는 아니 된다. 천박한 학인들은 ‘식색의 본능’이라는 이 한마디를 인간의 모든 부도덕한 욕망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너무도 반추 없이 범하고 있으나, 인간의 생겨 난 그대로의 모습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성향이 이 식욕(食欲)과 색욕(色欲)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생지(生之)’를 대체한 말이 ‘식색(食色)’이고 보면 고자는 성(性)을 곧 식색(食色)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생(生)’을 버리고 우리는 ‘성(性)’을 운운할 수 없다. ‘생(生)’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려는 의지(Will to live)’일 뿐이다. 살려는 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순간의 생명의 유기체적 조합상태를 유지시키려는 노력일 뿐이다. 그 노력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그 노력의 현재성이 곧 ‘식(食)’이다. 우선 먹어야 산다. ‘식(食)’은 현존의 기본이다. 그러나 나의 존재의 연면(延綿), 나의 생명의 지속과 관련되는 충동이 ‘색(色)’이다. 색을 통하여 모든 생명체는 자기복제를 완수하고 종의 역사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식색은 생(生)의 전부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서구의 가장 큰 양대사상 주류인 맑스가 식(食)의 문제를 인간학의 주제로 삼았고, 프로이드가 색(色)의 문제를 인성의 근본으로 파악한 것만 보아도, 고자의 ‘식색성야(食色性也)’라는 이 한마디는 매우 포괄적인 인간이해의 심도를 과시하는 명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더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식색성야(食色性也)’라는 이 한마디 직후에 그가 ‘인내의외(仁內義外)’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학인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양자를 별도의 무관한 명제로 취급하고 있으나 기실 고자는 식색(食色)과 인의(仁義)를 같은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의의 문제도 결국 식색(食色)의 자연지성(自然之性)의 근거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성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자가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 fallacy)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도 식색은 무제약적인 충동이나 무제약적인 만족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절제와 조절의 기능이 없이는 그 자체로써 유지되기 힘든 매우 미묘한 것이다. 나는 집에서 닭을 키우고 있다. 현재 나의 집 닭장에서 13마리의 암탉과 1마리의 수탉이 있다. 수탉은 황금빛 갈기가 아름답게 목을 덮고 있어 그 녀석의 이름을 ‘유비(有斐)’라고 지었다. 그런데 유비가 병아리 시절부터 성징을 나타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가장 맹렬하게 주는 모이를 독식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섹스를 하기 시작하고 나머지 닭을 거느린다는 의식이 생겨나고부터는 항상 암탉들에게 모이를 양보하고 가장 늦게 먹는다. 아주 맛있는 것이 있어도 먼저 암탉들을 불러 먹이고 자기는 뒤늦게 남은 것을 처치하거나 먹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병아리를 거느리고 있는 암탉에게서는 예외없이 관찰되는 것이지만, 다 큰 수탉이 암탉들에게 모이를 양보하는 현상은 단순한 생식(reproduction)과 양육(nourishing)의 본능으로써만은 설명되기 어렵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의 프로토타입이 우리가 흔히 식색(食色)이라고 규정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의지의 결단의 연속성이 일관되게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식색 그 자체로서 우리는 선악을 논할 수 없다. 그리고 식색을 본능이라는 말로서 비하시켜서도 아니 된다. 우리의 모든 문화적 활동의 총체가 식색의 문제일 수도 있다. 종교ㆍ예술ㆍ정치ㆍ산업, 그 모든 것이 식색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있다. 정치의 모든 문제가 결국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무엇이든지 독식(獨食)ㆍ과식(過食)하려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고자가 의(義)를 외(外)라고 말하여 장자에 대한 존경을 말한 것도, 결국 식색(食色)의 연면(延綿)이라고 하는 기나긴 시간성에서 본다면 후행(後行)하는 나라는 생명체에 대하여 선행(先行)하는 장자(長者)의 생명체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닭을 키워보면, 부화되는 기수에 따라 병아리의 동아리가 형성되는데, 대체로 선행하는 그룹이 후행하는 그룹에 대하여 권위를 갖는다. 후행하는 그룹은 선행하는 그룹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위방식이나 지혜를 존중한다.
고자가 ‘인내의외(仁內義外)’를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며, 맹자가 주장하려고 하는 보편적 선의지의 선험적 근원성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논의는 엄밀한 논리적 대결이 될 수가 없으며, 우열이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논쟁이 아니다. 맹자는 고자의 ‘인내(仁內)’는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고자가 말하는 ‘의외(義外)’도 ‘의내(義內)’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자가 말하는 인(仁)과 의(義)가 맹자가 말하는 인(仁)과 의(義)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논쟁의 주어가 다르기 때문에 술부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고자의 인(仁)은 맹자가 말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을 가리키는 인(仁)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친애성(親愛性)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부모나 나의 형제, 별 턱없이 마음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관계의 덕성을 말하는 것이며, 의는 이에 대비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입증되어야만 하는 덕성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자에 대한 존경은 오직 그가 나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고 하는 객관적 사실에 준거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맹자는 그러한 객관적 사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를 ‘존경한다’고 하는 그 마음은 내 마음의 내적 상황일 뿐이므로, 의(義)도 외(外)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의(義)에 대한 다른 측면들로부터의 해석일 뿐이지, 동일한 차원에서의 논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의(義)라고 하는 것은 나의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실천을 통하여 입증되는 것이라는 그 객관적 측면은 주관적 동기에 의해서만 다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고자의 ‘인내의외(仁內義外)’의 입설(立說)은 『묵자(墨子)』의 「경(經)」하77에 ‘인의를 내외로 규정하는 설은 틀린 것이다. 그 이유는 오안에 있다[인의지위내외야내(仁義之爲內外也內(非), 설재오안(說在仵顔)]’【‘오안(仵顔)’이 뭔 말인지는 잘 모른다】이라는 말이 있고, 이에 대한 「경설(經說)」의 긴 설명이 붙어있다. 그리고 『관자(管子)』의 「계(戒)」 편에, 관중(管仲)이 환공에게 정치를 할 때 경계해야 할 사항을 타이르는 말 중에 ‘인종중출(仁從中出), 의종외작(義從外作)’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전후에 매우 복잡한 설명들이 있으나 의미의 맥락이 별로 명료하지 않다. 그리고 이 『묵자』와 『관자』의 언어가 반드시 『맹자』라는 문헌에 선행하는 것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도 없다. 오히려 고맹논쟁에 촉발된 논의의 영향으로 성립된 파편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묵자』 『관자』 등에 이러한 논의가 실려있다는 사실은 고자의 논의가 고자 일개인의 창발이라기보다는 고자 이전에 이미 있었던 디스꾸르의 한 논리적 형태이며 그것을 고자가 생의 측면에서 창조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맹자의 사상은 고자의 사상에 대한 안티테제가 아니라, 그것을 발판으로 한 발자국 더 본질적인 도약을 시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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