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자전거 여행을 하는 이유
▲ 10월 6일(화) 상주시 → 문경새재 / 62.04KM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아직도 29.21km나 남아 있다. 문경새재 근처에는 오르막길이 여러 군데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 길을 달려야 하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걱정이 된다. 그런데 막상 달려보니 한 번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있었을 뿐 그렇게까지 힘든 길은 아니더라. 그게 정말 다행이었다.
▲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함께 간 동지들
여기 자전거 길은 민가를 관통하여 가기도 하고 국군체육부대 앞을 질러가기도 했다. 국군체육부대에선 ‘세계군인체육’ 대회를 하고 있는 중이라 경비가 나름 삼엄하더라.
완벽하게 어둠이 대지에 내려앉았다. 자전거 플래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이미 어제 저녁에 이런 어둠 속을 달려본 경험이 있으니 무섭거나 비극적이진 않았다. 어제는 펑크 난 자전거를 타고 가야 했는데, 지금은 모든 자전거들이 멀쩡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그저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기만 했고 함께 달릴 4명의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면서 행복하기만 했다.
▲ 열심히 달린다. 힘들 텐데도 불평 한 마디 없이.
한참 가다 보니 갑자기 반짝반짝 불야성이 펼쳐진다. 금방 전까지는 호젓한 시골길이었는데, 한 코너를 돌자마자 휘황찬란한 도시가 나타난 느낌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문경온천이 있어서 번화한 곳이더라. 거기엔 모텔이 즐비했고 각 건물의 불빛이 도로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저 곳 어딘가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하며 달리는데, 준영이는 좀 더 달려야 한다고 알려주더라.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은 이후부턴 준영이가 안내해주고 있다. 재욱이가 안내해주는 게 답답했던지, 준영이가 자진하여 안내해주게 된 거다.
휘황찬란한 불빛은 뒤로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만이 가득해졌다. 그 도로를 20분 정도 달리니 언덕 위에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게스트하우스도 거기에 있었다. 8시가 넘어서야 아무 문제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제에 비하면 오늘은 늦기만 했을 뿐 아주 무난한 날이라 할 수 있다.
▲ 서울대의대 연수원을 지나간다. 불빛이 반갑다.
내 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문경새재게스트하우스
게스트 하우스는 4인 1실이며 각 방은 벽으로 막혀 있지 않고 사물함과 커튼으로 나눠져 있다. 한 방엔 2층 침대 두 개가 있어 먼저 온 사람이 1층을 배정 받아 사용하는 형식이다. 아이들은 한 방에 배정을 받아 짐을 풀었고 나만 따로 한 방에 배정을 받았다. 평일이라서 혼자 쓸 수 있으려나 내심 기대했는데, 지금은 군인체육대회 기간이라 숙소마다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 우리 방엔 군인체육대회에 참가하는 학생 한 명과 자전거 여행 중인 한 명 이렇게 세 명이 자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기 집인 양 떠들기 시작한다. 벽으로 막혀 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소음방지는 될 텐데, 그러지 않으니 주의를 줬다.
주인 내외분이 되게 편안하게 대해주셔서, 우리도 편하게 씻고 저녁이 준비될 때까지 인터뷰를 하며 쉬었다. 저녁은 한 공기 밥 위에 반찬에 올려진 형태로 주며, 아침은 서양식으로 챙겨 준다. 일인당 삼 만원인데 계획을 짤 때 현세가 알아본 곳이라 우리는 오게 되었다. 아이들은 분위기도 좋고 자는 곳도 맘에 든다고 평했지만, 밥과 반찬을 더 달라고 할 수 없는 점은 불만족스럽다고 하더라.
▲ 가로등조차 없는 곳은 정말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뿐이다.
인천에서 하루 만에 문경까지 달린 사나이
간혹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을 하루 만에 완주한 사람도 있다’는 뜬소문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사람인 이상 체력이 저하될뿐더러, 바람이나 날씨의 영향을 받다 보면 하루는커녕 5일 이상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방에 함께 머물게 된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분은 인천 아라뱃길에서부터 시작해 하루 만에 문경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무려 259.13km를 하루 만에 주파한 것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땐 하루 만에 자전거 여행을 끝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달려보니 만만치 않아서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단다. 거의 파김치가 되었으며, 어찌나 맹렬히 페달을 굴렀던지 무릎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였다.
▲ 이걸 하루 만에 왔다는 것인데, 대단한지, 어리석은지 각자 판단의 몫으로.
무엇을 위해 달리나?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처음엔 ‘대다나다(무도 행쇼버젼)’라는 생각이 차츰 그건 여행도 아니고, 극기훈련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행위라는 생각으로 변해갔다. 그 사람도 그게 느껴지던지 “내일 부산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그냥 대구까지만 가서 쉰 후에 부산까지 가려구요”라고 하더라.
2009년에 목포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어갔었는데, 그때 든 생각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한 경로로만 걷다 보니, 지나가며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지역을 거쳐 갔지만, 그때 가봤으면 좋을 만한 곳들을 모두 지나가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보여행을 떠올리면 ‘걸어서 종주했다’는 생각만 남았을 뿐, 정작 과정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이 사람도 이 여행이 끝나면 ‘그때 미치도록 달렸지’하는 감상만 남을 것이다.
국토종단 때의 아쉬움이 있기에, 이제는 여행을 계획할 땐 ‘목표 중심적인 여행이 아닌, 과정 중심적인 여행’으로 짜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 남한강 도보여행 땐 어떻게든 명성황후 생가를 보고 가려 했고, 중간 중간에 미션을 하여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번 자전거 여행에 대해서도 ‘무엇을 위해 달리나?’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린 그냥 심심하기에,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니다. 그저 순간에 충실히 살아보기 위해, 그리고 지금 당장 느껴야 할 것들을 느끼기 위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언제든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함을 몸소 느끼기 위해, 지금 당장 한 획이라도 긋기 위해 페달을 밟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도 나의 이런 말에 대해 공감했나 보다. 아무래도 하루 빡시게 달려 안 아픈 곳이 없다 보니, ‘좀 즐기면서 달리세요’라는 말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순오지旬五志』의 ‘삼일 가야할 길을 하루에 가고 열흘 눕는다(三日之程, 一日往; 十日臥.).’라는 말은 여행자라면 되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이 말을 몸소 체험했기에, 내일부턴 조금 더 즐기며 달려야겠다고 말하더라. 역시 떠나보면 내가 무엇에 쫓기며 사는지, 얼마나 목표중심적으로 사는지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때가 어찌 보면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지만,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오늘 이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은 것이, 자전거 여행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의 여행도 어느덧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도 좀 더 즐겁게, 이 순간을 즐기며 신나게 달려보자.
▲ 저녁과 아침 식사 모습. 이렇게 챙겨주니 꼭 집밥을 먹는 것처럼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양은 비록 적지만 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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