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생각하기 힘든 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테마
종교, 국가, 심지어 주체마저도 철학이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힘이 있습니다. 철학은 자명하다고 전제되어온 모든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고별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소롭다는 듯이 피하고 있는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테마입니다. 물론 철학이 사랑 자체를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이 사랑을 우리로부터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낯설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철학은 사랑이란 테마를 더욱 자명한 것으로,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공리(axiom)처럼 전제하고 출발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점은 플라톤 이래로 지속되는 철학에 대한 통념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말 자체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지혜’를 뜻하는 ‘소포스(sophos)’로 구성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일종의 은유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글자 그대로 철학은 지혜에 대한 동경과 연모, 그리고 그것과 합일하려는 의지를 가리킨다는 것일까요? 이상한 것은 ‘지혜’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던 철학자들도 막상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엄밀함을 추구하는 철학조차도 ‘사랑’ 이라는 일상적 의미에 의존해 있고, 또한 이런 일상적 의미를 매우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 자체를 문제 삼게 되면 철학 역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지금도 철학자들은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면, 철학자들이 도리어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도 사랑을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도 아직 낯설게 보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가족’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맑스의 혹독한 비판 이후 ‘국가’라는 것은 이미 그 찬란한 광휘(光輝)를 일정 부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너무나 눈이 부셔 그 실체를 볼 수 없는 태양처럼 여전히 자신의 불가사의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G. Freud, 1856~1939)【프로이트는 처음에는 빈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그후 히스테리를 연구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했다. 그는 정신병의 원인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던 기존의 의학자들과는 달리 정신병이 정신 자체의 고유한 메커니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그는 인간의 의식 이면에 무의식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주요 저서로 『히스테리 연구』, 『쾌락 원리를 넘어서』, 『꿈의 해석』 등이 있다】가 그 빛을 거두어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공로는 인간을 지배하는 무의식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정신분석학은 자유의지나 이성이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초라는 통념을 붕괴시키게 된다. 인간은 원초적인 욕망과 사회화 과정이 결합되면서 구성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이런 원초적 욕망이 우리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사회화 과정은 인간의 내면에 초자아‘를 구성한다고 보고 있다】은 주체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아버지 - 어머니 – 아이’라는 오이디푸스(Oedipus) 삼각 구조, 즉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비록 욕망 놀이와 주체 구성의 논리로 가족의 신화를 공격했지만, 여전히 가족은 신성불가침한 그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가가 없는 국가를 꿈꾸는 사람들, 즉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가족이 없는 가족을 꿈꾸는 사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여행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처럼, 국가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도 모두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들의 안식처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안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족의 품속에서는 국가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 간의 첨예한 구분이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요? 가족은 모든 모순과 대립을 화해시키는 장소.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자명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대부분이 여전히 ‘가족’을 낯선 그 무엇으로 숙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헤겔 같은 철학자처럼 ‘가족’을 ‘사랑’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친숙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가족도 당연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족을 문제 삼았을 때 사랑을 문제 삼는 경우와 동일한 불편함이 발생하는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나 ‘가족’을 그 자체로 사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나 가족을 그 자체로 사유한다는 것은 애초에 ‘사랑’이나 ‘가족’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랑’이나 ‘가족’을 하나의 결과물 혹은 하나의 도착점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사랑’이나 ‘가족’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묻고 숙고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과 가족을 우리에게서 낯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가족’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L. Witgenstein, 1889~1951)도 철학의 핵심에는 결국 의지의 문제가 개입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사랑과 가족을 문제 삼았지만 실패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의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미 구성된 가족, 즉 ‘아버지 - 어머니 – 자식’이라는 부르주아 가족 모형에 입각해서 사랑과 가족을 사유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사랑과 가족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문제 삼았던 셈입니다. 한마디로 프로이트는 사랑과 가족을 사유하는 데 있어 철저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일상적 이해 방식은 사랑의 완성을 가족을 구성하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결혼이란 형식을 통해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만약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에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일종의 미완성, 혹은 비극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런 일상적 이해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헤겔【헤겔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던 철학에 역사성, 혹은 시간성을 도입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이나 사회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즉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처럼 변증법은 부정의 논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은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생성하는 세계의 본질 자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 강요』 등이 있다】로부터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매우 난해할 뿐만 아니라 심오하기까지 하다는 상식적인 예상을 깨고, 그는 너무나 친숙한 사랑과 가족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헤겔이 어렵다는 인상은 어쩌면 우리가 그의 철학을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헤겔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도록 하죠.
사랑은 일반적으로 나와 타자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져 있다는 의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나아가 나와 타자 그리고 타자와 나의 통일을 자각함으로써 나의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58[보유]
헤겔은 말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사랑 속에서 나는 타자와 ‘하나’라는 전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결국 헤겔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에 대한 경험이자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표현인가요? 쉽게 풀어보도록 하죠.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나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런 ‘하나’라는 느낌에 입각해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레나데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혼이야.”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야.”
그런데 문제는 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그 타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의 경험을 하고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타자가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느낀 ‘하나’의 경험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헤겔의 사랑은 낭만적이지만, 그만큼 또한 유아론적인(solipsistic)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헤겔은 사랑이 함축하는 유아론적 성격을 서둘러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그가 ‘가족’을 도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랑의 감정(Empfindung)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Gegenständlichkeit)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통해 비로소 이런 객관성을 갖게 되며 또한 바로 자녀를 통해 결합의 전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자녀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에게서 다름 아닌 그 자신들의 사랑을 직감하는 것이다.
『법철학 강요』 173[보유]
헤겔의 말처럼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이라고는 하지만, 이 감정에는 아직 어떤 객관성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헤겔은 결국 사랑이 유아론적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나와 타자 사이에 자녀를 도입하고, 가족이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의 형태를 제안하게 됩니다. 헤겔의 제안은 사실 지금도 통용되는 방식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결혼한 딸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계속 아이를 낳지 않으면 네 남편은 언젠가 바람을 피우게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은 부부가 이혼하기 쉬운 법이야. 빨리 아이를 낳아. 그래야 부부간의 사랑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 분명 결혼한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2세를 낳을 수 있습니다. 헤겔은 이 2세를 바로 사랑의 ‘객관성 = 대상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녀(2세)를 나와 타자 사이의 사랑이 육화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자식, 즉 2세는 사랑의 현실화이자 동시에 그것을 매개하는 원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남자-여자-자식’이라는 변증법적 삼각형, 즉 ‘가족; 구조를 통해서 헤겔은 ‘사랑’의 유아론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탈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헤겔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았고 또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가 필연적으로 그 남편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헤겔의 논리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도입함으로써 부모 쌍방 간의 사랑을 교묘하게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을 유아론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해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헤겔의 기대와는 달리 남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족 자체가 사랑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헤겔의 사랑이 함축했던 유아론은 ‘가족’을 통해서도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그의 사랑, 즉 ‘하나’로의 열망과 열정은 쉽게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카프카
헤겔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형식일 것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는 헤겔의 사랑은 ‘남자-여자-자식’으로 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객관적인 ‘하나’로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의 이런 생각이 사랑과 가족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황홀경적인 일체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2세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가족이란 통일체, 이런 일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사랑은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낭만주의적인 가족 이미지 밑에 일종의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카프카(Franz Katka, 1883~1924)【카프카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뒤의 인간의 삶에 대한 비관적인 통찰로 유명하다. 그의 비관주의는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프라하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 법, 가족 등에 대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카프카는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억압 기제의 다양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으로 『변신』, 『소송』, 『성』 등이 있다】라는 위대한 문학자입니다. 그의 여러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는 일종의 불편한 느낌을 결코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의 여러 작품이 주는 이런 불편함과 낯섦은 바로 ‘하나’의 논리에 대한 그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Die Verschollene)』
그의 유명한 『변신』은 바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영업 사원으로서 그는 나머지 세 식구,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부양해왔습니다. 그는 이 가족의 유일한 경제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벌레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한때는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아들이자 오빠였던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뒤에도 잠시 동안은 가족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머지 세 식구는 곧 그레고르를 가족 성원에서 배제하려고 합니다.
“내쫓아버리는 거예요” 하고 누이동생이 말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오빠인 그레고르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계시니까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믿어온 것이 사실은 우리의 불행이었어요.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저것’이 그레고르란 말인가요? 만일 ‘저것’이 그레고르였다면, 인간이 자기와 같은 짐승과는 함께 살지 못한다는 것쯤은 벌써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나가버렸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렇게만 되었다면 오빠는 없어져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서 오빠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변신』
나머지 식구로부터 그레고르는 이제 아들이자 오빠가 아니라 ‘저것’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레고르의 추방을 정당화합니다. ‘만약 저것이라고 불리는 벌레가 오빠였다면, 벌레로서 나머지 식구에게 폐를 끼치기 전에 스스로 가족 성원으로부터 탈퇴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것은 식구에게 지금 폐만 끼치고 있다. 따라서 저것은 가족 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추방해야만 한다.’ 벌레로 변해버린 오빠가 스스로 가족을 탈퇴한다면, 오빠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나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이동생은 말합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스스로 나가든지 아니면 식구에 의해 추방되든지 간에 이제 가족 성원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머지 식구의 추방 선고를 들은 그날 밤 그레고르의 심리 상태를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감동과 애정을 갖고 집안 식구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보다 그 자신에게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공허하고 편안한 명상 상태에 있는 그의 귀에 새벽 세 시를 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 문득 그의 머리가 저절로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콧구멍으로부터 마지막 숨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변신』
이렇게 그레고르는 죽어갑니다. 마지막까지 가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말입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고, 결국 가족에 의해 배제되어 죽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카프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되물으며 『변신』이란 소설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신』에서 진정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 여러분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변신한 것은 집안의 기둥에서 집안의 식충으로 바뀐 주인공 그레고르일까요? 아니면 벌레가 된 아들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경제생활에 뛰어들어야 했던 아버지일까요? 아니면 공부를 그만둔 여동생일까요? 사실 변신의 주인공은 이 모두 가운데 그 누구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킨 것은 놀랍게도 바로 ‘가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가족’이란 것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변형하는 일종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 그리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식으로 구성된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족’은 자신 안에 속한 인간들을 지배·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거대한 벌레였던 셈입니다. 그레고르가 죽은 후 나머지 세 식구는 전차를 타고 교외로 소풍을 나갑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가족’이란 거대한 벌레는 그들이 그렇게 하게끔 새로운 명령을 하달한 것입니다. ‘가족’은 나머지 세 사람에게 그레고르가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새롭게 불어넣습니다. “전차가 내려야 할 장소에 도착하자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제일 먼저 일어나 싱싱한 팔다리를 쭉 뻗었다. 부부의 눈에 그녀의 모습은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느껴졌다.(변신)” 이제 그레고르가 부양했던 ‘가족’은 그레고르 없는 ‘가족’으로,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여동생의 모습을 통해 다시 화려하게 되살아난 것입니다.
사랑을 ‘둘’로 생각하는 바디우
카프카의 통찰은 헤겔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남녀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가족’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전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사랑-가족-사랑-가족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연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카프카의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생산하는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숙고해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실마리로 우리는 왜 헤겔이 그렇게도 사랑에 대해 조바심을 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가족으로 지양(止揚, Aufheben) 되지 않는다면 유아론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위험성이 그가 사랑을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 즉 ‘하나(the One)’라는 이념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라는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 사랑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게 됩니다. 여기에 현대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 1937~ )【바디우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칸토르의 집합론, 맑스의 혁명이론,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 체계를 구성한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이 진리를 발견하거나 생산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역할은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이라는 네 가지 과정이 생산해낸 진리가 소통될 수 있는 통일된 개념적 공간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 『존재와 사건』, 『주체의 이론』, 『철학을 위한 선언』 등이 있다】의 철학적 통찰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라는 헤겔적 이념을 거부하면서, 사랑을 물로 사유하려고 했던 중요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하나’의 지배가 균열되었을 때, ‘둘’이 생각되어지는 장소이다. (……)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왜냐하면 이 둘은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하나’의 법칙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잉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 사랑이란 것은 만남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é) 속에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Manifeste pour la philosophe)』
사랑에 대한 조언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그런 조언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사랑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진정 두 사람 사이의 고유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을 ‘둘(the Two)’로 정의 내립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남녀에게는 ‘하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선언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사랑하는 당사자 ‘두’ 사람을 제외한 일체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낙랑공주는 자신과 호동왕자의 사랑 사이에 개입하는 일체의 요소를 거부하고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국가를 지켜주는 자명고(自鳴鼓), 외적이 침범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주는 북을 찢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국가도, 아버지도, 그리고 공주라는 신분도 사랑의 관계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사랑에 간섭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그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낙랑공주는 사랑이란 사건에 충실했던 주체였습니다. 반면 그녀가 사랑했던 호동왕자는 불행하게도 사랑을 배신했던, 사랑 이외의 다른 요소를 마음에 품었던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낙랑공주의 사랑이 비극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연인의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사실 사랑은 가족도, 국가도, 신분도, 신념도 초월하게 만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 즉 ‘둘’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열정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만드는 혁명적인 힘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사랑을 계속 ‘둘’이라고 정의하면서 ‘둘’에 충실하라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디우에게 있어 남성과 여성의 경험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하나’로의 통일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성은 생리를 하고 또 임신을 합니다. 이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남성도 육체적으로 여성의 이런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녀가 생리를 할 때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또 그녀가 임신했을 때도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하나’로의 통로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다시 말해 불가피한 ‘둘’이라는 상황하에서만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자신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성취한다는 것, 즉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실 사랑의 종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둘’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 논리에 포획되었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유아론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디우가 강조한 ‘둘’이란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공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디우의 사랑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등반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산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매번 산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산’과 ‘우리 자신’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서 구성되는 둘의 관계를 무한히 펼치게 될 뿐입니다. 반면 산을 완전히 알았다거나 혹은 산과 하나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실 등산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런 오만한 생각을 갖게 된다면, 등산가는 심한 경우 산에 의해 죽음을 맞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처럼 산은 자신을 정복했다고 오만하게 자만하는 사람을 품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등산가들은 항상 산을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산을 알기 위해서 다시 산을 찾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산은 ‘둘’이라는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발산하면서 그들을 매혹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바디우의 사랑은 유아론에 빠질 위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아론은 ‘둘’을 ‘하나’로 여기는 헤겔적인 착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헤겔은 사랑이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가족’ 속에서 ‘사랑’이란 결국 유기체로서의 가족 자신의 생존 논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점에서 카프카는 바디우에 앞서 이미 ‘하나’라는 통일의 원리를 문제 삼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 이르러 헤겔의 ‘하나’라는 이념은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바디우는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으로서 ‘둘’이란 공리를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사랑의 주체로 머물기 위해서 ‘둘’이란 공리를 끈덕지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말은, 결국 우리에게 ‘둘’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지와 결단을 ‘방법론적 고독(methodological solitude)’ 이라고 부르도록 해봅시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doubt)【방법론적 회의는 다른 명제에 의해 설명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명확한 명제를 찾으려고 한 데카르트의 시도를 말한다. 그는 감각적 지식, 수학적 지식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차례로 거부한다. 최종적으로 그가 조금의 의심도 없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였다. 이처럼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명제를 찾으려는 시도를 ‘방법론적 회의‘ 라고 부른다】’가 생각하는 사유 주체를 정초했던 것처럼, ‘둘’에 충실하려는 방법론적 고독은 사랑의 주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고독’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빠진 주체가 사랑하는 타자 속에서 일종의 무한성(infinit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 속에서 경험하는 무한성 앞에서 유한한 우리는 항상 고독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자가 신의 침묵 속에서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점에서 사랑의 진리를 생산해내는 과정 자체가 바로 무한성과 유한성의 지속적인 조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키스하면 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는 왜 나의 진심을 몰라 줄까?’ 우리는 계속 그(녀)의 심연을, 그 무한성을 더듬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착각에 일순간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오만이지요. ‘아! 그(녀)는 키스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그 다음 순간, 그(녀)는 키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 나의 키스를 허용했다고 해서 그(녀)가 계속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그(녀)도 만약 내가 키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타성적으로 키스에 응해준다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변할 것입니다. 이처럼 타자를 이제 완전히 알았다는 생각, 타자와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죄악이자 배신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자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무한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둘’의 공리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법론적 고독은 타자에 대한 나의 생각,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이 유아론적인 것이 아닐까라는 회의를 언제나 수반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방법론적 고독은 헤겔의 자기의식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우리가 타자와 나의 통일을 자각함으로써 나의 자기의식을 획득한다고 말했지만, 사랑의 고독 속에 있는 우리는 타자 가운데서 나 자신을 인식하거나 획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경우라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남편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다면 결국 그에게 있어 가족이란 논리는, 가족 성원을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사랑의 악무한(惡無限)【악무한은 일종의 무한 소급과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신주는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신주는 민정과 같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민정은 무엇인가?”라고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이 경우는 다시 “민정은 광동과 같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결정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사태를 ‘악무한’이라고 말한다】 속에 빠뜨리는 덫이 되는 셈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변증법적 원환, ‘하나’를 지향하는 사랑과 가족의 논리를 고안했습니다. 이처럼 헤겔의 자기의식은 오로지 ‘하나’ 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방법론적 고독은 ‘둘’을 끈덕지게 유지하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법론적 고독이란 우리가 나의 ‘바깥’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나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자 은총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리이자 ‘둘’의 진리인 것입니다.
방법론적 고독으로부터 얻어진 통찰을 통해 우리는 ‘가족 없는 가족’, 즉 ‘하나가 부재한 가족’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여자–자식’이란 가족 형식에 둘의 공리를 관철시키려는 것입니다. 바디우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서도,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여전히 물을 지향해야 합니다. ‘남자-여자-자식’이라는 오이디푸스 가족 구조를 결코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가족은 ‘남자와 여자’라는 둘의 관계, ‘남자(아버지)와 자식’이라는 ‘둘’의 관계, 그리고 ‘여자(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둘의 관계가 겹쳐져 있는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남편은 자식 속에서 자신이나 아내를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내도 자식 속에서 자신이나 남편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아내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즉 ‘둘’의 요소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은 자식으로부터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르시시즘(narcissism)【나르시시즘은 자신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인 것처럼 사랑하는 자기애의 메커니즘으로, 정신분석학의 중심 개념 중 하나이다. 나르시시즘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 즉 나르시스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부터 저주를 받은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즉 전형적인 유아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버지로서 자식을 진정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라는 사랑의 진리를 반드시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말이죠.
더 읽을 책들
이숙인,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서울: 여이연, 2001)
서양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여성과 가족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직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전통적인 여성관과 가족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성과 가족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꿈꿀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 『에밀』 (김중현 옮김, 서울: 한길사, 2003)
가족과 사랑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입니다. 책 중간 중간에서 번뜩이는 루소의 날카로운 통찰력
을 엿보는 것은 우리에게 독서의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기존의 모든 사랑에 대한 담론은 ‘하나’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사랑이 기본적으로 둘을 지향해야만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만남이라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고 정의 내리는 도전적인 주장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이종영,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 (서울: 새물결, 2001)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맑스의 정치경제학 등 현대의 학문적 성취를 이용해서 여성의 억압 문제를 해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가부장제를 보다 치밀하게 분석하여 여성해방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려는 저자의 정신이 돋보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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