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이미지의 구성이 이렇게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이렇듯 유장하다 보니,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그 비밀은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도 없고, 아무나 알 수도 없다.
껍데기가 아닌 실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
조선 후기의 문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질뇌(疾雷)」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레 소리에 산이 무너져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해가 중천에 솟아도 소경은 보지 못한다.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며, 왕도와 패도, 의(義)와 리(理)의 구분을 속인은 변별하지 못한다. 아아! 세상의 남아들이여. 눈과 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 영각(靈覺)에 있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靈覺)이라고 한다. 또 『채근담』에서는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은 뜯을 줄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 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人解讀有字書, 不解讀無字書, 知彈有絃琴, 不知彈無絃琴, 以跡用, 不以神用, 何以得琴書之趣]?”라고 하였다.
현란함과 기교만으로 포장된 가짜 시
좀 길지만 이규보(李奎報)가 시로써 시를 논한 「논시(論詩)」 한 수를 읽어 보기로 하자.
作詩尤所難 語意得雙美 |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
含蓄意苟深 咀嚼味愈粹 |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씹을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
意立語不圓 澁莫行其意 | 뜻만 서고 말이 원활치 못하면 껄끄러워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한다. |
就中所可後 彫刻華艶耳 | 그 중에서도 나중으로 할 바의 것은 아로새겨 아름답게 꾸미는 것뿐. |
華艶豈必排 頗亦費精思 | 아름다움을 어찌 반드시 배척하랴만 또한 자못 곰곰히 생각해 볼 일. |
攬華遺其實 所以失詩眞 | 꽃만 따고 그 열매를 버리게 되면 시의 참 뜻을 잃게 되느니. |
邇來作者輩 不思風雅義 | 지금껏 시를 쓰는 무리들은 풍아(風雅)의 참 뜻은 생각지 않고, |
外飾假丹靑 求中一時耆 | 밖으로 빌려서 단청을 꾸며 한 때의 기호(嗜好)에 맞기만을 구하고 있다. |
意本得於天 難可率爾致 | 뜻은 본시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갑작스레 이루기는 어려운 법. |
自揣得之難 因之事綺靡 | 스스로 헤아려선 얻기 어려워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
以此眩諸人 欲掩意所匱 | 이로써 여러 사람 현혹하여서 뜻의 궁핍한 바를 가리려 한다. |
此俗寢已成 斯文垂墮地 | 이런 버릇이 이미 습성이 되어 문학의 정신은 땅에 떨어졌도다. |
李杜不復生 誰與辨眞僞 |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다시 나오지 않으니 뉘와 더불어 진짜와 가짜 가려낼까. |
我欲築頹基 無人助一簣 | 내가 무너진 터를 쌓고자 해도 한 삼태기 흙도 돕는 이 없네. |
誦詩三百篇 何處補諷刺 | 시 삼 백 편을 외운다 한들 어디에다 풍자함을 보탠단 말가. |
自行亦云可 孤唱人必戱 | 홀로 걸어감도 또한 괜찮겠지만 외로운 노래를 사람들은 비웃겠지. |
모두 32구에 달하는 긴 시이다. 시(詩)의 참 뜻을 벗어난, 알맹이 없는 화려한 수식만 일삼는 당대 사단(詞壇)의 통폐를 날카롭게 통매한 내용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 현란한 기교로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시인들, 그들은 눈속임에만 급급하여 함축함양(含蓄涵養)하는 공부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참다운 시정신은 이미 땅에 떨어져 회복의 희망도 찾을 길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이규보의 이러한 한탄은 현금(現今)의 시단(詩壇)에도 여전히 유효할 듯 싶다.
인용
3. 허공 속으로 난 길
5. 이명과 코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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