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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허공 속으로 난 길 - 3. 허공 속으로 난 길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허공 속으로 난 길 - 3. 허공 속으로 난 길

건방진방랑자 2021. 12. 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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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허공 속으로 난 길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시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이유

 

조선 후기의 문인 이옥(李鈺)이언인(俚言引)이란 글에서 시는 만물이 사람에게 가탁하여 짓게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귀와 눈으로 들어와서 단전(丹田) 위를 맴돌다가 끊임없이 입과 손을 따라 나오니, 시인과는 상관하지 않는다[故其假於人, 而將爲詩也, 溜溜然從耳孔眼孔中入去, 徘徊乎丹田之上, 續續然從口頭手頭上出來, 而其不干於人也].”고 말했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갖추고 있어, 단지 시인의 입과 손을 빌어 시가(詩歌) 언어(言語)로 형상화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때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含蓄)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한편 시에서 말하고 있는 표면적 진술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우가 말한 대로 영양의 발자취일 뿐이다. 표면적 진술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행간에 감춰진 함축, 언어와 언어가 만나 부딪치며 속삭이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취(生趣)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새들이 둥지를 떠나지 않은 이유를 유추하며 쓴 고조기의 산장야우

 

이제 실제 몇 수의 작품을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하자.

 

昨夜松堂雨 溪聲一枕西 어제 밤 송당(松堂)에 비 내려 베개 머리 서편에선 시냇물소리.
平明看庭樹 宿鳥未離栖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

 

고려 때 시인 고조기高兆基)가 지은 산장우야(山莊雨夜)란 작품이다. 어찌 보면 덤덤하기 짝이 없는 시이다. 간 밤 비가 와서 아침에도 새가 둥지에 틀어 박혀 있다는 것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전부인 셈이다. 그러나 독시(讀詩)를 여기서 그치면 영양의 발자취만을 따라가다 끝내는 눈앞에서 놓치고 마는 격이다.

 

제목으로 보아, 시인의 거처는 속세를 떠난 호젓한 산중이다. 시인은 간밤에 비가 왔다는 사실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잠결 베개머리 서편으로 들려오던 시냇물소리뿐이다. 시냇물소리를 새삼스럽게 느낀 것으로 보아 계절은 봄이다. 간밤 시냇물소리에 잠을 설친 시인은 새벽녘 들창을 연다. 여느 때 같으면 동 트기가 무섭게 조잘대며 시인의 잠을 깨웠을 새들이 오늘따라 잠잠한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새들은 왜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있을까? 간밤의 비 때문에 숲이 온통 젖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새들의 하는 양을 보다가, 간밤 꿈결에 어렴풋하던 시냇물소리가 기실은 비 때문에 물이 불어났기 때문임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산이 있고, 그 속에 집이 있다. 방 안에는 시인이 있고, 둥지 안에는 새들이 있다. 사방은 고요하고, 정신은 해맑다. 이른 새벽 들창을 열어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법열(法悅)의 생취(生趣). 이것을 더 이상 무슨 언어로 부연할 수 있겠는가.

 

 

 

풍경화를 묘사하듯 한시에 담아낸 이달의 박조요

 

隣家小兒來撲棗 이웃 집 꼬마가 대추 따러 왔는데
老翁出門驅小兒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小兒還向老翁道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不及明年棗熟時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걸요.”

 

위 시는 조선 중기의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이 지은 박조요(撲棗謠), 즉 대추 따는 노래이다. 파란 하늘 아래 빨갛게 대추가 익어가는 촌가(村家)의 가을 풍경을 소묘한 것이다. 이웃 집 대추가 먹고 싶어 서리를 하러 온 아이가 있고, “네 이놈! 게 섰거라.”하며 작대기를 들고 나서는 늙은이가 있다. 서슬에 놀라 달아나던 꼬마 녀석도 약이 올랐다. 달아나다 말고 홱 돌아서더니 소리를 지른다.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4구는 영감! 내년엔 뒈져라가 된다. 그래야 내년엔 마음 놓고 대추를 따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늙은이가 아무리 잰 걸음으로 쫓아온다 해도, 꼬마는 얼마든지 붙잡히지 않고 달아날 자신이 있었던 게다.

 

이달(李達)은 이러한 즉물적 풍경의 섬세한 포착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렇다면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일까. 문면에 드러난 것은 대추 서리하다가 들킨 꼬맹이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이다. 그렇다고 이 시의 주제를 젊은 애들 버릇없다쯤으로 설정하는 어리석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파란 가을 하늘과 빨갛게 익은 대추의 색채 대비, 커가는 어린 세대와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늙은 세대의 낙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감 넘치는 시골의 순후한 풍경이, 마치 단원 김홍도의 붓끝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듯하다.

 

 

 

함축함으로 상상의 여지를 만들어낸 백광훈의 홍경사

 

다음은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홍경사(弘慶寺)란 작품이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가을 풀, 전조(前朝)의 절 남은 비(), 학사의 글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천년을 흐르는 물이 있어서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

 

이 작품을 다시 이렇게 배열해 보면 어떨까.

 

 

가을 풀

고려(高麗) 때 절.

남은 비()

학사(學士)의 글.

천년(千年)

흐르는

물이 있어서,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

 

 

이미지의 배열이 박목월(朴木月)불국사(佛國寺)를 연상시킨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구름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소리

 

 

처음 12구에서 시인은 돌올(突兀)하게 가을 풀과 고려 때의 절, 남은 비석과 학사의 글을 제시한다. 각 단어의 사이에는 일체의 서술어가 생략되어 있어, 1구에서 시인이 가을 풀에 묻혀 버린 퇴락한 고려 때의 절을 말하려 한 것인지, 가을 풀처럼 보잘 것 없이 영락해버린 고려 때의 절을 말하려 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전자라면 추초(秋草)’전조사(前朝寺)’의 배경을 이루고, 후자라면 등가적 심상이 된다. 2구의 ()’학사문(學士文)’의 관계도 그렇다. ‘잔비(殘碑)’는 동강나 굴러다니는 비석인데, 거기에 예전 이름난 학사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시인의 의도는 퇴락한 절과 굴러다니는 비석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예전 명문의 허망함을 일깨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그 긴 세월 문장만은 아직도 빗돌에 남아 전함을 말하려는 것인가? 이 또한 명확치 않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시시콜콜히 갈라 따지는 것은 오히려 시의 총체적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12구의 조응관계를 본다면 추초(秋草)’잔비(殘碑)’, ‘전조사(前朝寺)’학사문(學士文)’이 각각 대응을 이룬다.

 

다시 여기에 34구가 이어진다. 천년을 흘러가는 물이 있고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이 있다. 이번엔 12구와는 달리 천년의 긴 세월과 저물녘의 한 때가 나란히 놓여짐으로써 12구의 대응관계는 34구에서는 대조의 관계로 전이된다. 물은 천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구름은 어떠한가. 그것은 언제나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닌가. 34구는 천년과 하루에서 만이 아니라 물과 구름을 통해서도 대립의 관계가 형성된다. 4구의 ()’의 주체는 누구인가. 시인 자신으로 볼 수도 있고, 천년을 흘러가는 물일 수도 있다. 주체를 시인으로 이해한다면 34구는 자연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착잡한 심회를 노래한 것이 된다. 또 주체를 물로 이해한다면, 천년을 의연히 변치 않고 흐르는 물이 온갖 덧없이 변화해가는 것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음을 뜻하게 된다.

 

가을 풀은 여름날의 변화를 뒤로 하고 시어져 간다. 그 풀과 같이 예전의 영화를 뒤로 하고 퇴락한 절. 예전 학사의 명문을 새긴 비석에는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만 남았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이미 가고 없는데 그래도 글만은 아직 남았다. 천년을 쉼 없이 흐르는 물, 물은 흘러갔건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위에 해는 지고 구름은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간다. 한 해가 가고, 하루도 가고, 구름도 왔던 자리로 돌아가고, 인간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흘러도 흘러도 그 자리에서 넘치는 강물처럼 모든 것은 또 그대로가 아니었던가.

 

위 시에서 서술관계가 생략됨으로 해서 발생되는 모호성(Ambiguity)은 일상적 언어에서처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양자택일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결과적으로 시의 함축과 내포를 더욱 유장한 것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20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한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상 세 편의 감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단청(丹靑)의 수식과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天眞)에서 우러나오는 흥취(興趣)가 결여된 시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든다.

 

정선(鄭敾), 인곡유거(仁谷幽居), 18세기, 27.5X27.3cm, 간송미술관

인왕산 골짜기 봄 안개 속이다. 주인은 방문을 활짝 열고 밖을 본다. 앞에 책 한 권이 놓였다. 온통 연둣빛으로 물오른 산과 나무와 풀들. 쇄락하다.  

 

 

 

인용

목차

1.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빛

2. 영양이 뿔을 걸듯

3. 허공 속으로 난 길

4.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5. 이명과 코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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