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양(羚羊)이 뿔을 걸듯
대저 시인은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시인의 정신처럼
송나라의 유명한 평론가 엄우(嚴羽, 약 1290~1364)는 그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으니, 책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으니 이치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으니,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夫詩, 有别材, 非關書也; 詩有别趣, 非關理也. 然非多讀書多窮理, 則不能極其至, 所謂不渉理路不落言詮者, 上也.
시라는 것은 성정(性情)을 읊조리는 것이다. 성당(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羚羊)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가 없으니,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詩者, 吟咏情性也, 盛唐諸人. 惟在興趣, 羚羊掛角, 無迹可求. 故其妙處, 透徹玲瓏, 不可湊泊, 如空中之音, 相中之色, 水中之月, 鏡中之象, 言有盡而意無窮.
시에는 별재(別才)와 별취(別趣)가 있어, 책 속에서 얻는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으로는 시의 비밀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면 책과 이치를 버려두어도 타고난 재능만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엄우(嚴羽)의 이 말은 다소 절충적이다. 이런 어정쩡함을 벗어나기 위해 엄우(嚴羽)는 ‘불섭리로 불락언전(不涉理路 不落言筌)’, 즉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최상승(最上乘)의 법문(法門)이라고 부연한다. 이 말은 시인이 언어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시인이 한 번 사변의 늪에 빠져 들게 되면 생취(生趣)는 간 데 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구호이다.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 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시인의 정신을 본질 아닌 말단으로만 쏠리게 한다. 그 결과, 시인의 정신은 간 데 없고 가공된 언어만이 판치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암호이다. 옛 사람은 이를 조충전각(雕蟲篆刻), 즉 ‘벌레를 조각하고 글자의 아로새기는 교묘한 재주’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시의 흥취, 그리고 흥취를 감상한다는 것
엄우(嚴羽)는 시인이 지녀야 할 미덕을 ‘흥취(興趣)’에서 찾는다. 앞에서 말한 ‘생취(生趣)’와도 같은 말이다. 영양(羚羊)이 뿔을 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는 본래 선가(禪家)의 비유로, 『전등록(傳燈錄)』에 설봉존자(雪峯尊者)의 말로 전해진다. 영양(羚羊)은 뿔이 앞으로 꼬부라진 염소이다. 그런데 이 영양은 잠을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꼬부라진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잠을 잔다고 한다. 따라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 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발자취가 끝난 곳에서도 영양은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흥취(興趣)를 지닌 시란 어떤 시인가. 그것은 투철하고도 영롱하여, 무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엄우(嚴羽)는 이를 다시 몇 가지 비유를 통해 가시화(可視化)한다. 공중지음(空中之音)ㆍ상중지색(相中之色)ㆍ수중지월(水中之月)ㆍ경중지상(鏡中之象)이 그것이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소리나 형상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채, 그리고 물속에 찍힌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속의 달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 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 맛으로 소금의 성분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흥취(興趣) 또한 이와 같아서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한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로 하여금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엄우(嚴羽)는 ‘언유진이의무궁(言有盡而意無窮)’란 말로 위 단락을 끝맺었다. 시란 말은 끝났어도, 뜻은 다함이 없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비유컨대 종을 치면 종소리는 긴 파장을 내면서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이렇듯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젓가락으로 냄비 뚜껑을 두드리듯 해서는 안 되고,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 주견심(朱見深), 「동지양생도(冬至陽生圖)」, 15세기, 58.5X39cm
뿔 굽은 영양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다. 저뿔을 어찌 나무에 걸고 매달렸을까? 이것은 단지 비유의 언어일 뿐이다.
인용
3. 허공 속으로 난 길
5. 이명과 코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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