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4. 유(幽)가 성(誠)으로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성(誠)으로부터 명(明)하여 지는 것을 성(性)이라 일컫고, 명(明)으로부터 성(誠)하여 지는 것을 교(敎)라고 일컫는다. 성(誠)은 곧 명(明)이요, 명(明)은 곧 성(誠)이다. 自, 由也. 德無不實而明無不照者, 聖人之德, 所性而有者也, 天道也. 先明乎善而後能實其善者, 賢人之學, 由敎而入者也, 人道也. 誠則無不明矣, 明則可以至於誠矣. 자(自)는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덕은 실제가 아님이 없고 명(明)은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은 성인의 덕(德)으로 본성에 따라 소유한 것이니, 천도(天道)다. 먼저 선(善)에 밝은 후에 그 선을 실증할 수 있는 것은 현인의 학문으로 가르침에 따라 들어가는 것이니, 인도(人道)다. 성(誠)은 밝지 않음이 없고, 명(明)은 성(誠)에 나갈 수 있다. 右第二十一章. 子思承上章夫子天道ㆍ人道之意而立言也. 自此以下十二章, 皆子思之言, 以反覆推明此章之意. 여기까지가 21장이다. 자사는 윗장의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뜻을 말한 것을 이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하 33장까지의 12장은 모두 자사의 말로 반복하여 이장의 뜻을 미루어 밝힌 것이다. |
‘자성명 위지성 자명성 위지교(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여기서는 제1장의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의 구조에서 도(道)만 빠지고 성(性)과 교(敎)를 다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이것은 한 사람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여기서 ‘성론(誠論)’을 집어넣고 있는 것인데, ‘성론(誠論)’을 집어넣어서 이야기를 한다면, “‘성(誠)’으로부터 밝아지는 것이 ‘성(性)’이요, ‘명(明)’으로부터 ‘성(誠)’하여 지는 것이 ‘교(敎)’이다.”
중용(中庸)의 위대한 말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사실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내력이 있습니다. 중용(中庸)이라는 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예요. 이런 위대한 도덕(道德)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루아침에 구성된 게 아니라, 사실은 종교적인 배경과 내력에서 축적된 것입니다.
마을 안은 코스모스, 마을 밖은 카오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명(明)’은 “유명(幽明)을 달리한다, ‘유(幽)’와 ‘명(明)’이 딱 갈려 버렸다”고 할 때의 그 ‘명(明)’입니다. ‘혼(魂)’과 ‘백(魄)’이 갈려지는 게 죽는 것인데, “혼백(魂魄)이 달리 했다”와 “유명(幽明)을 달리 했다”는 사실은 같은 말이지요. 이것은 구조적으로 본다면, 밝다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을 번역할 때 문명(文明)이라고 번역했던 것처럼 그런 ‘명(明)’의 체계를 가리킵니다. 이원적으로 보자면, ‘유(幽)’라는 것은 카오스의 세계이고, ‘명(明)’이라는 것은 코스모스의 세계예요. ‘유(幽)’라는 것은 카오틱해서 몰라, 인간이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이 아는 것은 뭐냐, 자기들의 인식구조에서 질서라고 뽑아낸 코스모스의 세계입니다. 코스모스는 항상 인간에게 밝게 인식이 되고, 카오스는 인간에게 어둡게 인식 되요. 인간의 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육체, 인간의 ‘백(魄)’의 세계는 명백하다, 그것은 ‘명(明)’하다! 그러나 ‘혼(魂)’의 세계는 ‘암(暗)’하다, 컴컴하다, 혼돈스럽다!
옛날에 마을공동체를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이런 ‘혼백(魂魄)·기혈(氣血)’의 문제를 공간적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마을만이 인간의 코스모스요, 마을을 벗어나면 카오스의 세계이다! 마을 밖은 맹수들이 우굴거리고 무섭고 어두운 세계이고, 사람들이 함부로 못가는 세계인 것이죠.
카오스에 사는 도깨비
그래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에 얼씬거리고 있는 것들이 도깨비입니다. 옛날에 도깨비들은 다 그런 경계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을 안팎을 가르는 그런 경계에다가 신목(神木)을 만들고 성황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도깨비들보고 “니들은 여기까지만 와라!” 이겁니다. 옛날에 여자들이 어쩌다가 밤에 부득불 마을 사이를 오갈 때 뒤에서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치마를 자꾸만 잡아 당겨요. 치마자락을 잡아당기는 도깨비의 손을 탁! 치고 또 당기면 탁! 치고, 모르는 채 이렇게 걸어가면서 탁 치고 탁 치고…<웃음> 도깨비가 나타날 때, 도깨비를 아는 척하면 절대 안 됩니다. 아는 척하면 그게 도깨비에게 홀리는 거예요. 모르는 체 해야지, 아는 척 했다가는 죽습니다. 모르는 체 하고 가는 게 도깨비하고 싸우는 것이죠. 도깨비가 주욱 따라오다가 동네 어귀까지 이르면 사악 사라집니다.
옛날에 정말로 도깨비가 있었어요. 나도 봤으니깐, 같이 놀고 그랬으니깐. 그러니까 마을 안은 인간의 세계이고, 마을 밖은 카오스의 세계요 귀신의 세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이라는 한 몸에서 보면 여긴 인간의 정신의 세계이고 여긴 인간의 육체의 세계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제사는 수렵문화에서 발생했다
옛날에 제사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수렵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수렵이라는 것은 먹고 살려고 장정들이 모여서 카오스의 세계로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냥을 나갈 때에는 마을에서 거대한 제식이 벌어집니다. 이런 수렵문화의 제식에서 모든 제식이 나왔는데, 고대 구석기 신석기 시대 때부터 그 내력이 쌓여져 온 거예요.
수렵은 동네의 코스모스의 세계, 다 아는 세계, 질서의 세계에서 카오스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니까, 그 모르는 무질서의 세계, 귀신의 세계로 나가는 데 대한 불안감과 거기로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보호해 달라고 모든 제사를 드리는 것이죠. 또한 사냥을 해 가지고 돌아오면 포획물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제사가 크게 벌어집니다. 영신(迎神)이고 송신(送神)이고 모든 구조가 수렵문화의 구조에 있어요. 지금도 김금화씨 굿을 보면 돼지를 놓고 활 쏘고 창질하는 시늉을 하는 게 나오는데, 우리는 수렵문화의 잔재가 요즘의 굿에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요새처럼 의사가 진단을 해봐서 생물학적으로 죽었다는 판단을 내리는 어떤 기준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결국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세계는 마을 밖의 세계나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카오스의 세계로 간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삶의 세계는 밝음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는 ‘유(幽)’의 세계, 어둠의 세계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으로 점점 변천을 했는데, 서양의 경우에는 갓(God)으로 발전한 겁니다. 원시공동체로부터 귀신이 점점 극대화 되어 가지고 갓으로 발전한 거예요.
합리적으로 카오스 세계를 성(誠)으로 설명하다
그런데 중용(中庸)에서는 이 ‘유(幽)’가 ‘성(誠)’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인간세의 합리적·도덕적 질서의 근본으로서의 자연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誠)’으로부터 ‘명(明)’하여지는 것, 어두운 데서부터 밝아져 내려오는 것, 그것이 바로 ‘성(性)’입니다. 휴먼 네이춰(Human Nature)! 본체적인 세계죠. 서양철학으로 말한다면, ‘성(性)’은 본체(substance)가 되는 것이고 ‘교(敎)’라는 것은 현상(phenomena)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誠)’에서부터 ‘명(明)’으로 내려오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성(性)’의 문제이고, 대신 이미 밝아져 있는 질서의 세계로부터 이 문명의 법칙을 배워서 ‘성(誠)’으로 나가는 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학습입니다. 교육심리에서 말하는 학습(learning)이라는 것은 이미 주어진 규범을 가르쳐 주는 것이요, 문명 속에서 주어져 있는 질서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誠)’으로 가는 것이예요.
‘명(明)’을 통해서 ‘성(誠)’으로 가는 것은 모두 다 교육이다, ‘자명성(自明誠)’은 다 ‘교(敎)’다! 사실 ‘자성명(自誠明)’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흐름에서 볼 때,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논점을 빌린다면 기본적으로 성인(聖人)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 최초의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은 어두운 데서 문명을 맨들어 냈으니깐 ‘자성명(自誠明)‘이죠. 『주역(周易)』에 보면, 그물을 어떻게 만들고, 불을 어떻게 만들고 등등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는데, 이게 문명의 창조를 말하는 겁니다. ‘자성명(自誠明)’의 세계는 성인(聖人)들이 세계이고, ‘자명성(自明誠)’의 세계는 범인들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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