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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1장 - 5. 보편적 패러다임인 성(誠)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1장 - 5. 보편적 패러다임인 성(誠)

건방진방랑자 2021. 9. 1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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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보편적 패러다임인 성()

 

 

언어가 나를 빌려 표현한다

 

자명성(自明誠)’의 구조와 현상을 미셸 푸꼬의 이론, 디스코스(discourse, 담론)의 이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푸꼬의 담론이란 쉽게 말하면, 인간은 언어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언어의 창조자들이지만, 범인들은 언어의 창조자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언어를 수단으로 해서 나의 사고를 표현한다고 생각하지만, 푸꼬는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이죠. 푸꼬의 생각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빌려서 자기를 표현할 뿐이라는 겁니다. 개별적인 우리의 사고가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디스코스, 담론이 선행한다는 것이죠. 언어가 우리의 존재 이전에 이미 있다는 말이예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를 단지 습득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언어에 의해서 우리가 지배당해가는 과정, 즉 우리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서 프레임 당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인간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기만적(deceptive)입니다. 자기가 창조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언어는 그 언어의 사용자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모든 언어의 정의에서부터 단순한 습득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그 습득을 잘하면 문명화된 인간(civilized man), 즉 그 문명에 적응을 잘하는 인간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굉장히 기만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인식의 구조인데, 그 인식의 구조를 푸꼬는 에피스팀(epistem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인식의 구조는 사실은 순수한 인식의 구조가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 말한다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어떤 권력의 구조라는 거예요. 그 권력의 구조에 우리는 오염되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디스코스는 고정되어 있을 수가 없으니깐, 디스코스는 한동안을 지배하지 영원히 지배하지는 않으니깐, 그 디스코스가 어떻게 변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주자 같은 사람들은 뭡니까? 디스코스의 축을 바꾼 사람들이죠? 그런 의미에서 주자를 또 하나의 성인(聖人)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푸꼬의 논의는 참으로 기발합니다. 사회과학적인 문제를 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상당히 포괄적으로 밝혔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의 체계가 한낱 정치 권력의 도구화된 시대적 패러다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런 만큼 기만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상당히 재미난 통시적인(diachronic) 시각에서 규명해 나간 것이 푸꼬예요.

 

 

 

푸코는 위대하나 그의 말은 번잡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불란서놈들, 이 짜식들은 왜 그렇게 쓸데없이 말을 어렵게 만들어버리는지 읽기가 더럽게 난해해요. 내가 푸꼬를 읽은 바에 의하면(그의 저작을 모두 읽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별 게 없는데 그걸 가지고 지독하게 어렵게 구라를 풀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푸꼬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요. 말에 속아가지고 평생 푸꼬연구가다 이러고들 있고, 푸꼬의 말이 워낙 어려우니까 서로 너는 푸꼬를 몰라 나만 알아맨 그러고들 있습니다. 그게 전문가라고 서로 뜯고 찔러대고 그러고들 싸우다가 뒈지는 거지 뭐!

 

참으로 한심한 거예요! 나는 푸꼬 전문가들하고 몇 번 대화해보고, 푸꼬가 대개 어떤 놈이라고 파악하고 나면, 내 구라를 펴서 푸꼬를 말합니다. 내 식으로 파악하고 내 구라로 푸꼬를 넉아웃 시켜버리면 되는 것이지, 내가 미쳤다고 그 자식을 언제 다 읽어 주냐? <웃음> 그럴 필요가 없어요. 하여튼 핵심을 파악하십시오.

 

 

 

보편 패러다임으로서의 성()

 

자명성(自明誠)’이라는 것이 ()’이고, 결국 그것은 문명 속에서의 습득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 ()’를 거치기 마련이죠. 그런데 푸꼬가 이 ()’의 문제에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데 반해서, 중용(中庸)참으로 ()’하면 ()’할 수밖에 없고, ‘()’하면 궁극에 가선 ()’해진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푸꼬가 말하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줄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패러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역사의 변천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패러다임은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 패러다임이 바로 ()’이라는 겁니다. ‘()’만은 변할 수가 없다, 이것만은 양보가 되질 않는다! 이것은 대단한 말입니다. 21장은 대학생 시절에 읽었을 때, “바로 이거다!”라고 외쳤던 그런 장이예요. ‘자성명(自誠明)’, ‘자명성(自明誠)’을 읽는 순간 지금 설명한 것과 같은 구조가 아주 명료하게 잡혔던 겁니다. 대학교 3학년때 이 중용(中庸)을 읽고, 4학년때 동양적이란 의미를 쓴 거예요.

 

21
핵심
내용
천도
(天道)
22 24 26     30 31 32 33
전편
요약
인도
(人道)
23 25 27 28 29      

 

 

 

 

 

 

 

 

 

 

인용

목차

전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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