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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1장 - 1. 넓기에 깊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1장 - 1. 넓기에 깊다

건방진방랑자 2021. 9. 1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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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넓기에 깊다

 

 

지난 수요일 강의를 안 들은 사람은 중용(中庸)강의 전체를 안 들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오늘 중용(中庸)강의가 이번 3()의 전체 강의 중에서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만큼 시시하게 나올 수가 없어서, 이렇게 멋을 내고 나왔습니다. 내가 한복만 입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한복이 아니드래도 나는 멋을 낼 수 있어요.

 

내가 오늘 비로소 몸이 제대로 잡힌 것 같습니다. 항상 골치가 띵한 상태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오늘은 괜찮아요. 내가 그 미세한 바이러스한테 이토록 당해버렸다는 것이 일생일대의 수치입니다. 아직 ()’가 멀었다는 거겠죠.

 

 

 

하려면 최선을 다하자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학생들 하고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것을 잠시 소개하면, 도올서원에 온 학생들은 모두가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찾아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하나의 학생들이 모두 자발적인 의지가 있고 생각하는 바가 상당히 깊고, 참으로 이 시대에 좋은 학생들이 모인 것 같아요.

 

내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내가 도올서원에서 강의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교양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정말 모든 방면에 뻗을 수 있는 데까지 뻗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최소한 박사학위 논문을 써보는 데까지 나갔으면 좋겠고, 진취적으로 외국 유학도 갈려고 하고, 그렇게 해서 젊은 날에 여러분들이 받은 자극과 충격을 단순하게 교양적인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자기 방면에서 뻗을 수 있는 데까지 뻗어 줬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다들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민옹이 그랬듯 도올은 대학 4학년 때 논문을 썼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안에 동양적이라는 의미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쓴 글입니다. 이 글은 여러분 대부분들보다 어렸을 때, 약관의 나이에 중용(中庸)을 읽고 터득한 바를 바탕으로 쓴 글이고 또한 중용(中庸)을 읽고 나서 최초로 쓴 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어 보면 내가 지금 강의하는 내용의 기본 골격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거예요. ‘성자(誠者)’라든가 성지자(誠之者)’, ‘천도(天道)’, ‘인도(人道)’ 등에 대한 생각은 그 당시 남들이 나에게 강의해 준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읽고서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이런 논문을 썼고, 30년이 지난 이후에 이런 중용(中庸) 강의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의 성장과정이라든가 ((()등등에 대한 것들을 전부 다 ㅈ중용(中庸)에서 따온 것입니다. 동양적이란 의미를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읽어 보고, 지금의 내 강의와 비교해 보세요. 김용옥이는 불과 약관의 나이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이러한 논문을 썼다는 것을 헤아려 보면, 여러분들이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생생하게 비교해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한 인간의 생각의 여정을 한번 추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거예요.

 

내가 대학생 시절에 서양철학교수 등등 각 교수들이 강의에 들어 와서 막 떠드는데, 그 사람들이 다 제각기 평생 공부한 것을 가지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강의를 듣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하고 느껴졌었어요. 학생들은 인(), 센시티비티(sensitivity)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다 제대로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나는 이 선생이 이렇게 말하면 엣센스를 탁 취해가지고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하는 식으로 다 종합이 되더라고. 여러 선생님들의 강의가 정리되어 하나의 철학으로서 내 머릿속에서 나타나는데, 교수들은 서로 모르고 서로 비방하고 서로 무시하고 그러고 있었지요. 나는 그 당시 강의를 쫘악 들으면서 선생님들이 전달하는 것을 하나로 통합시키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쓴 글이 바로 동양적이란 의미예요. 여기에 보면 상당한 스케일의 생각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감히 이런 글을 쓰면서, “내가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건가, 이렇게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해서 써도 되는 건가?”하는 공포심이 대단했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 당시는 이런 글은 감히 쓸 수 없는 글이었거든요. 그런데도 나는 그 당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발분망식(發憤忘食)의 학문자세

 

그런데 그 당시 60년대에는, 서울 대학의 꼴찌가 고대 법대 일등으로 들어 올 정도였을 때니깐, 고려대학 철학과라고 하는 것은 최하 수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고대와 서울대학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같은 정도가 아니었어요. 고대는 지금 지방의 하바리 대학의 위치나 마찬가지였다고. 서울대학만 하나 우뚝 서 있고 연세대, 고대 할 것 없이 다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저 밑으로 쳐져 있었던 거죠. 그런 데다가 고려대학 내에서도 철학과라고 하는 것은 최하바리였습니다. 그 시시한 고려대에서도 최하바리였던 철학과의 무명의 촌놈 김용옥! 그런 사람이 쓴 논문이 동양적이란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 동양학에 대한 학문풍토가 없었던 60년대의 살벌한 상황에서 이런 논문을 썼고, 그 바탕이 오늘 내가 중용(中庸)강의하고 있는 현재의 바탕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 글을 보면 여러분들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꼭 한 번 이 글을 읽어 보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30년 전의 나와 비교해 볼 때에 나보다 더 유리한 조건 속에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30년 후에 지금의 김용옥을 능가해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게 내 생각입니다.

 

 

 

깊으면 넓을 수 없고, 넓으면 깊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아주 하찮은 이야기이면서도 사람을 기죽이고 병신 만드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깊이가 있으면 좁으며, 넓게 섭렵하는 놈은 얄팍하다든가, 글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못하며, 말 잘하는 사람은 글을 잘 못쓴다든가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많아요. 이런 말들은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은 근세에 들어오면서 프로이드의 인성구조론(personal structure theory)이 미친 영향이라고 생각되요.

 

프로이드의 인성구조론에는 자아ㆍ초자아ㆍ이드가 있는데, 프로이드는 이런 인성구조론에 입각해서 싸이킥 에너지를 닫힌계(closed system)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풍선에 비유한다면, 한 쪽을 눌러서 그 부분의 부피를 줄이면 다른 쪽의 부피가 늘어나는 식이죠. 초자아가 확대되거나 또는 자아의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가 강화되면 이드(Id)가 약화되어 무의식층에 어떤 축적이 진행되었다가, 잠잘 때가 되면 자아가 약화되므로 다른 쪽 부피가 늘어나서, 즉 이드가 활발해져서 이드적 충동이 표출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꿈의 내용이라는 것, 한마디로 인간의 피직 에너지(Psychic energy)는 일정한 규모를 갖는다는 것이 프로이드의 썰입니다. 이것은 바로 뉴톤역학적으로 인간을 규정한 거예요. 프로이드의 전 이론체계라는 것은 뉴토니안 다이나믹스를 전제로 해서만, 뉴톤역학적 인간관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한계 지우지 마라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어요. 프로이드의 이론에는 인간의 싸이킥 에너지를 물량적으로 정의해 놓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프로이드의 사고에는 전부 이런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말을 별로 하지 않죠. 그러나 분명히 프로이드의 인간관은 고전물리학적인 이론체계에서 보는 인간관입니다. 그러니까 융(C.G Jung) 같은 사람은 이런 생각에 반대했던 거예요. 그는 이드의 싸이킥 에너지를 터버렸습니다. 끝이 없다, 밑창이 없다 이거야! 그게 집단무의식입니다. 아케 타입 이론(arche type theory)이라든가 하는 융의 이론은 뉴토니안 메카닉스의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암암리에 자기의 싸이킥 에너지나 인간의 가능성을 뉴토니안 다이나믹스로 규정하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나는 벌써 대학생 때 그런 인간관에 대해서 반발을 느꼈습니다. 학문이, 서양학문이 사람을 죽이려 든다고 느꼈던 것이죠. 사람이 깊으면 넓지 못하고 넓으면 깊지 못하다는 등의 말은 기를 죽이는 말입니다. “! 김용옥! 니가 뭐 잘났다고, 여기 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온갖 거 다 하겠다고 설쳐대는 거냐?”고 사람들이 찔러대거든요.

 

그러나 인간은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폭을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넓으면 깊어질 수밖에 없고, 참으로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넓어지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의 싸이킥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형편없는 엉터리 같은 그림을 그리지 마십시오! 어렸을 때 이런 엉터리 그림에 빠지면 평생을 속습니다. ‘나는 말을 잘하니깐 글을 못 쓰는 게 당연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서는 글을 실제로 못 쓰는 병신들이 되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 말을 잘 하려면 글을 잘 써야 합니다. 글도 못 쓰면서 말만 잘하면, 그것은 엉터리 말이죠. 넓으면 깊지 못하고 깊으면 넓지 못하다는 말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엄청난 협박이고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짓부렁입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서도(書道)를 잘 못하고, 서도(書道)를 잘하는 사람은 그림을 잘 못 그린다는 맨 이따위 말들만 무성해요. 이런 엉터리 말들이 많은데, 이런 말들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말에 절대 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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