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
장유,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시풍의 수용 주장
17세기 한시사는 복고풍의 시대다. 비평에서도 17세기 후반까지 당시풍을 존숭하는 일련의 시화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 비평서들은 대부분 실제 비평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작품의 우수성은 당시에 얼마나 핍진(逼眞)한가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시사의 중심적인 흐름 이면에 18세기 새로운 시학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17세기 초반부터 싹트고 있었다.
명나라 복고파가 수용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초반 장유(1587~1638), 이식(1584~1647) 등은 복고풍을 비판하고 다양한 시풍을 개성에 맞게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유는 당시 문단의 폐해가 명시를 배우는 데서 발생하였다면서, 명나라 시문이 애초에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배우는 자들이 그 말단만 배우고 그 근본을 무시하여 그림자와 소리만을 추구하며 껍질을 벗기고 고기를 잘라 한 가지로 되어, 볼 만하지 않다고 하였다. 곧 명시를 배운 자들이 시의 음향과 기상만 따지고 옛 시를 모방하는 데 급급하였다는 것이다. 『계곡만필』에서 ‘시언지(詩言志)가 곧 진정(眞情)과 실경(實境)을 말한 다음에야 볼 만하고 그렇지 않아 억지로 빈 말을 만들면 공교롭다 하더라도 칭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거니와, 또 스스로 정한 다섯 가지 경계에서 두 가지가 표절하지 말자는 것과 모의(模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모의가 아닌 진(眞)에 바탕한 문학을 하기 위해서도 전범이 필요하다. 장유는 그 전범을 『문선(文選)』의 오언시(五言詩)에서 찾았다. 장유는 16세 무렵 김상용으로부터 한유(韓愈)의 글을 배웠고 또 『초사(楚辭)』와 『문선(文選)』을 읽어 시작(詩作)의 틀을 마련하였다(『谿谷漫筆』 권1 62a). 이식도 『당음』과 함께 『문선』을 숙독하였다고 한다. 인위적인 율시보다 고시가 진(眞)을 드러내기 적절하였기에 고시를 선택한 것이고, 이를 위하여 『문선』을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귀결처는 어느 특정한 유파에 매이지 않고 여러 시대 시의 장처를 취하여 자신의 개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장유는 젊은 시절 『문선』과 한유의 시를 읽고 오언고시만을 썼고 1613년 이후에야 두보(杜甫)와 이백(李白), 그리고 『당음(唐音)』을 읽었으며, 가행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생삽(生澁)하였는데 2-3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방편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거니와(『谿谷漫筆』 권1 63a), 그는 고시와 당시, 송시, 명시 등 다양한 시를 참작하였다. 오언고시와 가행 등에 자신이 생긴 다음에는 당과 송, 명나라 여러 작품들을 참조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谿谷漫筆』 권1 63a).
이명한은 장유가 유독 「이소(離騷)」와 『문선』의 시체를 좋아하였는데, 이윽고 그의 시가 성당의 풍격에 이르렀고, 정격, 변격, 우아한 격, 해학적인 격도 두루 하여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하여 마음먹은 대로 되었다고 하였다. 장유(張維)의 시가 한 곳에 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장유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오언고시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식의 다양한 시풍 추구 주장
이식(李植)이 추구한 바도 장유와 유사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식은 두시를 배우고 조선의 현실에 체화하려 한 이안눌(李安訥)의 노력을 이어, 두시를 배우는 데 가장 큰 힘을 쏟았다. 스스로 『두시택풍당비해』라는 방대한 주석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식도 젊은 두시를 배우는 어려움을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토로한 바 있다. 이식은 어린 시절 먼저 두시를 읽었고, 다음에 황정견과 진사도, 그리고 『영규율수(瀛奎律髓)』 등의 시를 읽었으며, 다시 『문선』과 『당음(唐音)』을 읽었지만 잘 배울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두시를 버리고 당시를 배울 수가 없어, 마흔이 넘어서야 호응린(胡應麟)의 『시수(詩藪)』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시를 배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식은, 결론적으로 시를 배울 때 어느 한 쪽만 전문으로 할 필요가 없으며, 먼저 고대의 시와 당시를 배우고 두시로 돌아가게 되면 될 것이라 하였다. 이식은 물론 당시를 배우기 위하여 두시를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시인이나 시풍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송시를 배척하지만 진사도와 진여의의 율시가 두보의 율시에 가까우므로 참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또 이몽양이 두시를 잘 배웠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고 하였다. 「학시준적(學詩準的)」은 시를 배우기 위한 지침을 적은 글로, 여기에는 시체별로 어느 한 인물이나 시기 시에 편중되지 않고, 그 장처에 따라 전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용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4.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