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한위(漢魏)의 시를 본뜨다
이러한 고시의 관심은 명 복고파의 시가 수입되면서 더욱 강도를 더하였다. 명 복고파(復古派)는 시경체(詩經體)의 한시나 고악부체를 크게 선호하였는데 명 복고파를 배운 우리나라의 시인들 역시 고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의현은 전대 김종직(金宗直), 이행(李荇), 박은(朴誾), 박상(朴祥), 노수신(盧守愼), 정사룡(鄭士龍), 황정욱(黃廷彧) 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고시선체(古詩選體)에서 그들이 남긴 것이 없는데 이는 한위(漢魏)의 시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고, 신흠(申欽)과 정두경(鄭斗卿)이 비로소 한위(漢魏)의 시를 받들어, 본뜬 작품을 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명(明) 복고파의 시를 배운 시인들로는 신흠(1523-1597), 윤근수(1537-1616)가 선구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며【『서포만필(西浦漫筆)』 619면】, 허체(1563-1640), 이정구(1564-1635), 신익성(1588-1644), 이민구(1589-1670), 이명한(1595-1645), 정두경(1597-1673) 등도 복고파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의 문집에는 고시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다. 신흠(申欽)은 성현(成俔), 정두경(鄭斗卿)과 함께 고대의 시를 재현하는 데 주력한 인물이거니와, 고악부에 뛰어나 한위(漢魏)와 수당(隋唐)에 이르기까지 본뜨지 아니함이 없어 혹사함이 있었으며 때로는 명나라 대가에게 발걸음을 옮겨 웅장함을 다투었다고 한다【장유(張維), 「현간선생집서(玄軒先生集序)」, 『계곡집』 권6】. 윤근수 역시 그 문집에 서문을 쓴 웅화(熊化)가 선진위한(先秦魏漢)에서 명대(明代)까지 두루 연구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1580년 이몽양(李夢陽)의 시집 『공동시(崆峒詩)』를 활자본으로 간행한 바도 있다【윤근수, 「崆峒詩跋」, 『월정집』 권4】. 허체(1563-1640)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의고풍의 한시로 이름이 높았다. 정두경이 오언고시에 약한 데 비하여 허체는 특히 오언고시에 뛰어나, 청초고아(淸峭古雅)한 시세계를 자랑하였다고 한다(『西浦漫筆』 623면). 이정구, 신익성, 이민구, 이명한 등도 복고파를 수용한 흔적이 있으며, 그들의 시집에 복고풍의 고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시의 대표주자: 정두경
정두경(鄭斗卿)은 이러한 계열 중 가장 수준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정두경(鄭斗卿)은 진한성당지파(秦漢盛唐之派), 곧 명 의고파의 벽을 세운 인물로 달마가 불교를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한 것과 같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명 복고파(復古派)와 같이 『시경(詩經)』을 종주로 하였고 고시악부는 한위가 가장 뛰어나고 율시는 정해진 체제에 구속되므로 고체의 고일함만 못하다고 주장하였다(「東溟詩說」, 『동명집』). 정두경이 가장 힘을 쏟은 곳도 고시였고, 또 고시가 그의 장처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의 가행은 조선 최고로 평가되었다. 정두경(鄭斗卿)은 드날리고 사나운 기세는 뛰어나지만 간절함과 여유로움이 부족한 것이 한계이기 때문에 그 장처가 절로 가행에 어울렸으며 오언고시에는 적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두경(鄭斗卿)의 가행은 성당의 풍기가 있어 임숙영의 변려체와 함께 중국의 명작과 나란히 둘 만하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종남총지(終南叢志)』 372면】. 가행에 능한 권필(權韠)조차도 초학자들처럼 위응물, 유종원, 장적, 왕건의 것을 배웠을 뿐, 칠언가행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두보와 이백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음에 비하여 정두경의 가행은 성당의 이백과 두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니 그 성과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고시에 대한 문단의 높은 관심은 고시선집(古詩選集)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특히 임방은 고시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였다. 임방은 1640년 『당음오언고시(唐音五言古詩)』라는 책을 엮고【임방, 「수서당음오언고시발(首書唐音五言古詩跋)」, 『수촌집』 권9】, 1662년 다시 『당시오언(唐詩五言)』을 엮었다. 그의 부친 임의백(任義伯)이 『당시품휘』에 실린 오언고시가 번다하다고 여겨 김수항에게 점선(點選)을 부탁하고 임방의 아우에게 필사를 맡겨 책을 완성한 바 있는데, 그 후 조카의 청에 의하여 다시 정선하여 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 한다【임방, 「제당시오언후(題唐詩五言後)」, 『수촌집』 권9】. 이를 이어 임방은 1691년 『가행육선(歌行六選)』을 엮었다. 당시 명시를 배운 이들은 오언고시는 한위(漢魏)의 것을, 칠언가행은 성당(盛唐)을 모범으로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과거에서 근체시만 위주로 하기에 『당음』을 보는 데 그쳤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임방은 부친 임의백(任義伯)의 명을 받아 『당음』과 『당시품휘』를 합하고 다른 책을 참고하여 성당뿐만 아니라 초당과 중당, 만당의 가행을 두루 택하여 2권의 책자를 만든 바 있는데, 자료를 널리 구하지도 못한데다 뽑은 것 역시 정선(精選)되지도 못한 것에 불만을 느껴 다시 경물을 잘 묘사하고 말을 만든 것이 청신한 것을 뽑고 그 품격에 따라 여섯 부류로 나누어 이 책을 만들게 된 것이라 한다【임방, 「가행육선서(歌行六選序)」, 『수촌집』 권8】.
인용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4.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