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제 의식
1) 매우 간단한 천군 묘사
「의승기」는 천군(天君)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덕이 쇠해 盜賊이 침입하자 천군이 황야로 피해 10년간 방황하다 성성옹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맹호연을 뽑아 도적을 퇴치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된다.
그런데 「의승기」에는 천상의 공간이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의식상에서도 전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인 요순임금이 계셨던 영대(靈臺)에서 어거하며, 태평세월을 구현하다 도적의 침입을 받고 방황하다 맹호연의 도움으로 도적을 퇴치하고 성성옹의 간언을 받아들여 남은 도적까지 교화시키는데, 그 후에도 천상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소략한 천군에 대한 묘사
천군이 즉위하던 때로부터 시작하는 부분을 보면, 천군에 대한 묘사는 간략하고, 바로 3년이 지나 도적이 침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천군이 즉위하던 원년에 영대(靈臺)에 올라 명당(明堂)에 어거하였는데, 마음이 담박하여 하는 일 없이도 스스로 지켰고, 덕이 넓고 넓어 일컬을 수도 없었다. 천군의 백성은 배를 두드리며 태평을 노래하면서 노닐었다. 다 말하기를 “한결같구나, 우리 천군이여.”하였다.
삼 년이 지나 천군의 덕이 점차 처음보다 능할 수 없었다. 도적이 그 틈을 타서 침범하고 능멸하기도 하고 해롭게 하기도 하고 붙잡아두기도 하고, 자르고 죽이기도 하여 해마다 도적이 날로 불어나니, 천군의 나라는 거의 떨치지 못했다.
天君卽大位元年, 登靈臺御明堂, 泊乎無爲, 澹乎自持, 蕩蕩乎無能名焉, 君之民鼓腹而遊, 咸曰一哉吾君.
越三年, 君之德漸不克于初, 有盜乘其釁, 侵凌我, 殘害我, 梏亡我, 翦劉我. 年年而賊日滋, 君之國幾不振.
천군은 즉위하자마자 영대에 올라 정사를 보는데, 여기서 천군에 대한 묘사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이룰 정도로 덕이 넓었고, 백성들이 그 태평세월을 노래하였다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천군이 정사를 보는 공간과 그 덕만이 제시된 앞부분은 양적으로도 매우 소략해, 서두가 장황한 「천군전」이나 「수성지」 등과 현저히 비교된다.
이 태평하던 세월은 3년 만에 끝나고, 덕이 쇠한 천군에게 도적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군을 침입하는 도적에 대해서도 이름이나 묘사가 없다. 단지 천군의 나라에 피해를 끼친 행동을 통해 사건을 직접 기술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천군은 할 수 없이 황야로 달아나 온 세상을 방황하는데, 이때는 역사상 구체적인 인물에 비유하며, 지상의 시간과 공간으로서 제시하였다.
천군이 마침내 황야로 달아나 온 세상을 돌아다니니 마치 진공자(重耳)가 외국에서 있었던 것이 십여년인 것과 같았다.
君遂遯于荒, 周流四海, 若晉公子之在外者十餘年.
위에서 천군이 온 세상을 방황한 것을 진헌공(晉獻公)의 아들 중이가 진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떠돌아다니며 망명 생활을 한 것에 비유해 구체화하였다. 실제 중이가 여희(驪姬) 사건으로 외국에 머문 시기는 도합 19년간 인데 위에서는 10여년이라 하였다. 이는 천군의 방황 시절을 중이의 경우에 비유하여 그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 한 중이에 비유한 것은 그 이름에 마음이 작용하는 이목구비(耳目口鼻) 가운데 하나인 이(耳)가 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이는 앞서 창계 39세 되던 기록에서 보았듯이, 신체의 부분들에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에, 비워두어야 본심의 작용을 회복하는데, 다른 마음이 들어가거나 생기면 본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위에서 천군이 방랑한 10여년의 시간은 도적이 침범해서 욕심, 분노 등으로 가득 채운 마음을 비워내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기에 필요한 시간으로 설정된 것이라 보인다.
전대 천군소설의 자세한 천군묘사
이처럼 「의승기」의 천군이 등장하는 첫 부분은 전대 천군소설들과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곧 천군이 천상에서 내려오기까지 과정과 그 인물묘사가 장황하고, 충신들이 등장해 천군으로서 갖추어진 모습을 보이는 「천군전」이나 「수성지」 등과 달리 「의승기」의 천군은 처음부터 지상에서 자리 잡은 인물로 나오고 그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없다.
동강의 「천군전」에서는 천군의 이름이 처음에 ‘理’였다가 인간세계로 내려오면서 ‘심(心)’으로 고쳤다하고, ‘신명전’에서 조회할 때 태재 경과 백규 의에게 명하는 등, 인간세계에서 천군이 자리 잡는 데 필요한 요소인 이름과 공간, 그리고 충신까지 함께 장황하게 소개하며 시작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또 백호의 「수성지」에서도 천군이 영대에서 즉위하는 장면이 상세하고 그 뒤 2년이 되어 주인옹(主人翁)이 상소하자 연호를 복초(复初)라 고쳤다 하여, 적어도 도적이 침입하기 전에 충신의 말에 따라 나라를 새롭게 정비하는 최소한의 방비 태세를 보이는 것과도 비교된다.
의승기의 천군은 단지 덕만 갖춘 존재
「의승기」에서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의 존재도 아니었고, 충신도 없이 홀로 등장해 덕을 펴다가 도적을 맞는다. 10년 방황 끝에 충신인 성성옹의 도움으로 왕위에 다시 올라 나라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결국 도적의 침입을 받고 나서야 천군에게 필요한 요소가 갖추어지는 「의승기」의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의 존재로서 이름과 연호, 충신 등을 갖추어 장황하게 묘사되는 천군과는 달리 단지 덕만을 갖춘 지상의 인물인 것이다.
환(宦), 도둑이 사는 공간에 대한 묘사
그 후 맹호연이 남은 도적을 공격하러 도적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그제야 도적이 사는 공간과 그 정체를 소개하는 부분이 자세히 묘사된다.
큰 바다가 있는데, 그 남쪽의 환(宦)이라는 데를 지나가니 이는 도적의 제일 요해처이다. 파도가 세차게 솟아올라 세상에 넘쳐 날 듯하였다. 앞의 배가 이미 뒤집어지고 뒤에 오는 것도 그치지 않아서, 돛대는 꺾어지고 노는 부러져 몇 천 개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도적을 치러 온 병사는 왕왕 이곳에 이르러 회군하였다. 관문을 명리(名利)라 하고, 산은 분심(忿心)이라 하며 골짜기는 욕심(慾心)이라 하니 모두 도적이 의지하여 험한 것으로 여겼다.
有大海經其南曰宦, 乃賊第一要害處, 波濤洶湧, 沃日滔天, 前船旣覆, 後來者不止, 崩檣敗楫, 曾不知幾千, 而討罪之師, 往往至此而回軍. 有關曰名利, 有山曰忿, 有壑曰慾, 皆賊之倚以爲險者也.
위에서 도적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상의 자연공간들과 그곳에 깃든 인간심리로 구체화되었다. 남쪽의 큰 바다에 도적의 제일 요해처인 환해가 있고, 그 관문에 명리가 있다고 하여, 멀리 있지만 언제든 다가가고자 하는 벼슬과 명리를 마음에서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지상의 공간에서 도적의 제일 요해처로 환해(宦海)가 제시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창계가 「의승기」를 저작할 당시(1664년)는 병자호란 직후로 출사를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 보인다.
또 도적이 사는 곳은 산과 골짜기로, 우리와 가까이 위치한 여기에 분심과 욕심이 깃들어 있어 늘 경계해야 할 마음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인간 마음의 여러 곳에 여러 형태로 자리하고 있으면서 언제든 인간 마음을 부추기려고 도사리고 있는 도적과 같은 우리의 마음 한 부분을 경계한 것이다. 특히 도적의 제일 요해처로서 환(宦)을 지목한 것은 창계가 가장 경계하고자 한 지점이라 하겠다.
인용
1. 서론
2. 창작의 배경
2) 창계의 생애와 문학성향
3. 주제 의식
4. 의의와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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